한국 문헌 가운데 고조선에 관한 가장 기본이 되는 사료는 고려시대에 저술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제왕운기'다. 조선시대의 역사서에 보이는 고조선에 대한 언급은 대부분 이 기록들에 대한 해석이나 주석 또는 고증들에 불과하며 그렇지 않은 내용이 있다고 하더라고 학자에 따라 견해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고조선 연구의 기본 사료로 채택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필자는 불필요한 논란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삼국사기'와 ' 삼국유사, '제왕운기' 기록만을 한국 문헌의 기본 사료로 삼고자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고조선에 관한 독립된 항목이 없다. 가장 일찍 고조선에 대한 항목을 설정하고 언급한 책은 '삼국유사'인데, 그 '기이'편에도 고조선의 강역이나 국경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는 내용은 전혀 없다. 그러나 단군에 대해 "당요가 제위에 오른 지 쉰 해가 되던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하였고, 또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겼는데 그곳을 궁홀산이라고도 하며 금미달이라고도 한다. 나라를 다스린 지 1,500년이 되어 주나라 호왕이 즉위했던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단군은 곧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로 돌아와 은거하여 산신이 되었고, 수명은 1,908세를 누렸다." 고 기록되어 있어, 고조선이 건국 후 평양성으로부터 백악산 아사달, 장당경, 아사달로 도읍을 모두 세 번 옮겼음을 전해주고 있는데, 그 가운데 두 번은 기자가 고조선 지역으로 망명 온 후에 이루어졌음을 알게 해준다. 따라서 단군이 통치했던 고조선은 기자가 고조선 지역으로 망명 온 후에도 여전히 존속했다. 고조선은 세 번에 걸쳐 도읍을 옮길 정도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 면적이 결코 좁지는 않았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러한 '삼국유사' 기록과는 달리 '제왕운기'에는 고조선의 강역을 좀 더 구체적으로 짐작하게 하는 기록이 있다. 즉 '제왕운기' 첫머리에 "요동에는 하나의 별천지가 있으니 중국과는 완전히 구분되며, 큰 파도 넓은 바다 삼면을 둘러쌌고 북쪽은 대륙과 선처럼 이어졌는데 그 가운데 사방 천 리가 조선이라, 강산의 형세 빼어남은 천하의 이름 있고 밭 갈고 우물 파며 예의 바르니 중국인들이 이름하여 소중화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고조선을 설명하면서 그 위치를 요동이라 했다. 그런데 고조선시대의 요동은 지금의 요동과 달리 북경 근처에 있는 지금의 난하 유역과 그 동쪽 지역을 지칭했다. 그러므로 위 인용문의 내용을 꼼꼼히 뜯어보면 고조선의 강역은 지금의 난하 유역으로부터 그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 전 지역을 포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위의 인용문에 나타난 전체적인 자리는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임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고조선의 강역을 말한 것이 아니라 '제왕운기'에서 다루어질 전체 내용의 지리범위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위 인용문을 보면 한반도와 만주의 전체 지리를 말한 후 " 그 가운데 사방 천 리가 조선이다."라고 표현한 것은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 가운데 일부인 사방 천 리가 고조선의 강역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상의 견해 차이는 고조선의 국가 구조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고조선의 국가 구조를 중국의 상나라나 서주와 같은 봉국제, 즉 중앙에 국왕이 직접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의 직할국이 있고 그 주위에는 국왕이 제후에게 위탁하여 다스리도록 한 제후국이 있는 국가 구조로 보느냐, 그렇지 않으면 서양의 고대 그리스와 같은 도시국가 즉 일정한 지역이 하나의 도시를 형성하고 그것이 바로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서 고대 중국과 같은 제후국은 존재하지 않으며 전 지역이 모두 최고 통치자의 직접 통치 아래 있는 국가 구조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고조선의 국가 구조를 중국의 상이나 서주와 같은 봉국제도로 본다면 위 인용문에 나타난 "그 가운데 사방 천 리"로 표현된 조선은 고조선의 최고 통치자였던 단군의 직할국이며, 그 주위에는 단군이 제후들에게 위탁하여 통치하도록 한 제후국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단군의 직할지였던 조선의 주위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에는 많은 제후국이 존재했다고 보아야 하므로 위 인용문이 말하는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은 고조선의 강역을 말한 것이 된다. 그런데 제후는 고대에 중국에서 사용했던 칭호이며, 한국에서는 그것을 거수라 했고 그 나라를 거수국이라 했다. 따라서 한국사에서는 거수와 거수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옳겠다.
그러나 고조선의 국가 구조를 고대 그리스와 같은 도시국가로 본다면 "그 가운데 사방 천 리"로 표현된 조선 자체가 고조선의 전체 강역인 것이며 그 주변에는 고조선과 대등한 독립된 많은 도시국가들이 존재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미 간행된 일부 한국사 개설서에서 고조선에 대해 설명하기를 흔히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있었던 여러 나라 가운데 고조선은 가장 일찍 발전한 나라였다.고 표현한 것은 바로 고조선을 서양의 고대국가와 같은 도시국가로 본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의 국가 구조를 도시국가로 보고 "그 가운데 사방 천 리"만을 고조선의 강역으로 볼 경우 '제왕운기'의 다음 기록은 모순을 일으킨다. 즉 '제왕운기'의 단군에 대한 저자 자신의 주석 가운데 "단군은 조선 지역에 웅거하며 왕이 되었는데 옛 시라, 고려,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와 맥은 모두 단군의 계승자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신라, 고구려, 남옥저, 북옥저, 동부여, 북부여, 예, 맥 들은 고조선 붕괴 후 한반도와 만주의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던 나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