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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후기의 서쪽 경계

by $램프 2023. 12. 28.

 

고조선이 붕괴된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고조선이 중국의 서한 초가지 존재해 있었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전국시대와 진제국시대, 서한 초기는 고조선 후기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중국 영토에 관한 기록을 통해 고조선의 서쪽 국경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진제국의 영토에 관한 기록은 그러한 작업을 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줄 것이다.

 

왜냐하면 진제국은 전국시대에 중국에 있었던 여섯 나라를 모두 멸망시키고 출현한 통일제국이었으므로 진제국의 영토는 전국시대의 중국영토를 모두 포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제국이 멸망하고 건국된 서한은 무제시대 이전에는 진제국보다 영토가 확장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진제국의 영토는 전국시대로부터 서한 초에 이르기까지의 중국 영토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진제국의 영토를 보면 '사기'에 "땅은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렀고 조선에 미쳤다. 서쪽은 임조, 강중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북향호에 이르렀으며 북쪽은 황하에 의거하여 요새를 삼고 음산과 나란히 요동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진제국이 멸망한 후 오래되지 않은 서한 무제 때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학계로부터 위대한 역사가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 위 기록은 신빙성이 있다.

 

그런데 위 인용문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고조선의 강역을 임의로 상정하고 그것을 전제로 고조선과 진제국의 국경을 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고조선의 강역이나 국경에 대해 아무런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료에 따라 그것을 확인하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위 인용문에 "진제국의 영토는 조선에 미쳤다."고 했으니 고조선과 진제국은 국경을 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진제국의 영토는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렀다고 했는데, 이 바다에 대해 '사기정의'에는 "발해 남쪽의 양주, 소주, 태주 등에 이르는 동해이다. 라고 설명되어 있다. '사기정의'는 당시대의 주석서이다. 그러므로 당시대의 양주, 소주, 태주를 확인해보면 지금의 강소성 양주시와 소주시 및 절강성 임해시로서 '사기정의'에서 말하는 동해는 지금의 황해와 중국 동해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동해와 더불어 진제국의 동쪽 경계와 맞닿아 있었던 것으로 기록된 고조선의 영역은 그 문맥으로 보아 동해의 북쪽인 북경이나 천진 또는 그 근처까지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며 고조선의 서쪽 경계는 좀 더 구체적인 고증이 필요하다.

 

앞에 인용된 '사기' 내용 가운데 "진제국의 영토가 북쪽은 황하에 의거하여 요새를 삼고 음산과 나란히 요동에 이르렀다."는 구절은 고조선의 서쪽 국경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 내용은 진제국의 북쪽 국경이 지금의 내몽골자치구의 황하 상류 유역으로부터 그와 나란히 시작되어 동쪽으로 뻗은 음산산맥을 따라 요동에 이르렀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요동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진제국은 동쪽에서 고조선과 접경하고 있었는데 그 북쪽 국경이 동쪽의 요동에서 끝났다면 요동은 고조선의 서쪽 변경 지역이었거나 요동과 고조선의 서쪽 변경이 서로 나란히 연접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서쪽 국경을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요동의 위치를 고증할 필요가 있다. 종래 대부분의 학자들은 고대의 요동을 지금의 요동과 동일한 곳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요동을 지금의 요동이나 후대의 기록에 나타난 요동으로 상정해서는 안 된다. 요동의 위치가 변화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서쪽 국경을 바르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요동이라는 지명이 지니고 있는 의미와 중국의 동북부 국경에 쌓은 전국시대 연나라와 진제국의 장성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앞서 본 바와 같이 요동은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 지역에 위치해 있었고 연나라나 진제국이 쌓았던 장성은 국경선상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요동에 대해 살펴보자. 앞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요동과 위치가 달랐다.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난하 유역이었고 오늘날의 요동은 지금의 난하 동부를 말한다. 이것은 요동이라는 지명이 동쪽으로 이동했음을 말해준다. 우선 요동에 대해 개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요동이라는 말이 원래 어떤 뜻을 지녔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요동은 요수 또는 요하의 동부 지역을 뜻한다고 믿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요동이라는 말이 지니고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에는 그 개념이 달랐다고 한다. 요동이란 '극동'이라는 뜻을 지닌 말이었다. 중국인들은 그들의 영토인 천하의 동쪽 끝을 극동이라는 의미로 요동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요동은 원래 요수나 요하의 동쪽이라는 뜻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요동이라는 말이 요수라는 강 이름이 먼저 생기고 그것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말이 아니었음은 요서라는 말이 요동이라는 말과 동시에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요동이라는 말은 전국시대에 이미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음이 문헌을 통해 확인된다. 그러나 요서라는 말은 그보다 훨씬 늦은 전국시대 말기에야 보인다. 전국시대 말기에 연나라가 장성을 쌓고 그 안쪽에 요서군을 설치함으로써 요서라는 말이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즉 중국의 동북부 변경에 극동을 뜻하는 요동이라는 지명이 생긴 후에 그 지역을 흐르는 강을 요수라고 부르게 되었을 것이며 요수의 서부 유역에 요서군이 설치됨으로써 요서라는 지명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견해가 옳다면 원래 요동이라고 불린 지역에는 요수의 동쪽뿐만 아니라 요수의 서부 지역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