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이 근대적 학문으로 정착하여 선사시대 연구에 도움을 주기 전에는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고대 역사를 전설이나 신화에 의존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선사시대에는 아직 문자가 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역사나 생활 체험을 기록으로 남겨놓지 못하고 입으로 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전해진 것이 고대 전설이다.
그리고 고대사회에서 씨족이나 종족은 수호신을 가지고 있다. 고대인들은 대세 자신들이 수호신의 후손이라고 생각했으며 인간만사와 모든 자연 현상을 수호신이 섭리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역사나 생활 체험을 자신들의 이야기로 남기지 않고 자신들을 섭리한 신들의 이야기로 남겨놓은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고대 신화에 나타난 신들의 이야기를 사람들의 이야기로 바꾸면 역사 사실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전설이나 신화는 그 내용이 사실보다 매우 압축되어 있다. 전달되는 과정에서 많은 내용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설로 한국에는 단군사화가 있다. 단군사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앞부분은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의 상황을 전해주는 내용이고, 뒷부분은 고조선 건국 후의 상황을 전하는 내용이다. 서구의 근대적 역사 연구 방법이 수입되기 전에는 한민족의 상고사가 단군사화로 전승되어왔다. 고려 말 13세기에 일연이 저술한 '삼국유사'에 실린 단군사화 내용 가운데 앞부분만을 보면, "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 환인의 지차 아들 환웅이 늘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탐내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굽어 살펴보니 삼위 태백이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할 수 있는 곳인지라 곧 천부인 세 개를 주어 내려가 인간세상을 합리적인 사회로 만들도록 하였다.
환웅은 무려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턱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그곳을 신시라 일컬으니 그가 이른바 환웅천왕이었다. 바람을 관장하는 어른 구름을 관장하는 어른을 거느리고 곡식 인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로 맡아 보살피되 무릇 인간의 360여가지 일을 두르 맡아 인간사회에 있으면서 그곳을 합리적인 사회로 진화 시켰다.
이때 곰 한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한 동굴 속에서 함께 살면서 항상 환웅신에게 빌기를 진화하여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다. 이때 환웅신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의 형상을 얻게 되리라고 일러주었다. 곰과 범이 이것을 얻어먹고 조심을 한지 37일 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호랑이는 조심을 하지 않아 사람의 몸이 되지 못하였다. 곰녀는 더불어 혼인할 사람이 없으므로 늘 신단수 밑에서 잉태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이 사람으로 변신한 뒤 그녀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아 단군왕검이라 불렀다.
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보다 조금 늦게 이승휴가 저술한 제왕운기는 단군사화를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즉,
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상제 환인에게 지차 아들이 있었으니 이름을 웅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웅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려가 삼위 태백에 이르러 크게 인간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 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웅이 천분이 세 개를 받고 귀신 삼천 명을 거느려 태백산 마루에 있는 신단수 아래에 내려왔다. 이분을 단웅천왕이라 부른다고 한다.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이 되게 한 뒤 단수신과 결혼시켜 아들을 낳게 했다. 이름을 단군이라 하고 조선의 땅을 차지하여 왕이 되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위 두 기록의 기본 골격에는 차이가 없으나 삼국유사의 환웅천왕이 제왕운기에서는 단웅천왕으로 되어있고 삼국유사에서는 환웅이 곰녀와 결혼하여 단군왕검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제왕운기에는 단웅이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이 되게 한 후 단수신과 결혼시켜 단군왕검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응제시주와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단군사화가 실려 있는데 응제시주는 삼국유사 내용을 따르고 세종실록 지리지는 제왕운기 내용을 따르고 있다. 두 내용 가운데 어느 것이 바른 내용을 전하고 있는지 지금으로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삼국유사에 실린 내용이 원초적일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곰이 여자로 변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한 것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여 제왕운기의 저자인 이승휴는 환웅의 손녀가 단군을 낳은 것으로 내용을 바꾸었을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한웅에게 손녀가 있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대개 삼국유사 내용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단군사화에 의해 인식되었던 한국의 선사시대는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수입되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고고 자료인 유적과 유물을 근거로 하여 선사시대를 말하게 된 것이다. 즉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등으로 설명하게 되었다. 그리고 선사시대에 대한 해석이나 설명은 꼭 자료에 의한 것만이 절대적이고 단군사화 내용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까지에 이르렀다. 고고 자료는 과학적이고 단군사화는 비과학적이라는 생각이 자리하게 된 것이다. 고고 자료가 과학적이라는 점은 옳다. 그러나 단군사화가 비 과학적이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 그것은 어느 하나만 옳고 다른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흑백논리다. 유적과 유물이 역사 연구의 자료가 되는 것처럼 단군사화도 역사 연구의 자료이다. 어느 한쪽만 옳은 것이 아니라 두 가지는 서로 보완 관계에 있는 것이다. 단군사화가 충분하게 말하지 못했던 부분을 고고자료가 보완해주는 것이다.
한국사 학계에서는 고조선이 고고학적으로는 청동기시대에 해당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단지 청동기시대 개시 연대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 차이에 따라 고조선은 초기부터 청동기시대였을 것으로 보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중기부터 청동기시대였을 것으로 보는 학자가 있다. 이 점은 고조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므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