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여, 양 동부여, 고구려 4국은 신조선의 판도 안에 세워졌다. 신조선이 멸망하여 부여가 되고 부여가 분열하여 동부여, 남동부여, 고구려가 됐는지 아니면 부여는 그냥 신조선의 별칭이고 별도로 부여라는 나라가 없는 상태에서 신조선이 위의 4국이 됐는지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신조선이 흉노족 모돈에게 패배한 시점이 기원전 200년이고 북부여, 동부여가 분립된 시점도 기원전 200년이니 두 번째 것이 사실에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 기존 역사서에서는 북부여와 동부여가 분립된 사실을 이렇게 기록했다. "부여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을 다니면서 기도하며 아들 낳기를 간구했다. 곤연에 이르자 왕의 말이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흐렸다. 이상해서 돌을 뒤접어보니 금빛 개구리 모양의 아기가 있었다. 왕은 '이는 하늘이 주신 나의 아들'이라 말한 뒤 거두어 길렀다. 금와라고 이름을 짓고 태자로 삼았다. 얼마 뒤에 재상 아란불이 왕에게 '요즘 하늘이 내게 강림하시어 말씀하시기를, 내가 장차 내 자손으로 이 땅에서 나라를 세우고자 하니 너희는 동해가의 가섭원으로 피하라. 그 땅의 토질이 오곡에 적합하다고 했다'면서 천도를 건의하자 왕은 그날에 따라 가섭원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동부여라고 했다. 기존 도읍에서는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는 오룡거를 타고 수행원100여 명은 흰 고니를 탄 채 웅심산에 내려왔다. 그러자 상서로운 구름이 머리 위에 뜨고 음악이 구름 속에서 퍼져 나왔다. 해모수가 십여 일 만에 산하에 내려와 새 깃털로 된 관을 쓰고 용의 광채가 나는 칼을 찬 채 아침에는 정사를 보고 저녁에는 하늘로 올라가니 세상 사람들은 그를 천제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어떤 사람들은 기록이 너무 신화적이라서 신뢰할 수 없다고 하지만 어느 나라든 고대의 신화시대가 있기 마련이고 후세 역사가들은 신화 속에서 사실을 채취하는 법이다. '말이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거나 '하늘이 아란불에게 강림했다'거나 '해모수가 오룡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야기는 물론 신화다. 하지만 해부루가 남의 사생아인 금와를 주워 태자를 삼은 것도 사실이고 해부루가 아란불의 신탁을 믿고 천도를 단행한 것도 사실이다.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면서 옛도읍을 이어받은 것 역시 사실이다. 이런 것들은 북부여, 동부여 분리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이것이 북부여나 동부여 사람이 부여의 역사를 서술하고자 기록한 게 아니라 고구려 사람이 자신의 시조 추모왕의 출신을 증명하고자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해부루와 해모수, 즉 동부여와 북부여를 분립한 두 대왕의 역사를 간략히 언급했을 뿐이며 부여 해부루의 출신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나마 고구려인의 기록이 그대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신라 말엽에 한학을 공부한 불교 승려가 고쳐 쓴 것이다. 그래서 '신가'를 고구려 이두대로 상가로 쓰지 않고 한문의 뜻에 맞춰 상이라고 쓰고 '가시라'를 고구려 이두대로 '갈시나'로 쓰지 않고 불경 표현에 맞추어 '가섭원'이라고 써서 본래의 문자를 드러내지 않은 것이 또 다른 유감이다.
당시의 제왕은 제왕인 동시에 제사장이었으며 당시의 장군이나 재상은 장군, 재상인 동시에 무당이고 점쟁이였다. 해부루는 제사장 즉 대단군의 직책을 세습한 인물이고 아란불은 신을 불러오는 무당인 동시에 미래를 예언하는 점쟁이를 겸한 상가였다.
대단군과 상가는 둘 다 높은 지위였지만 대단군의 책임이 훨씬 더 컸다. '삼국지'에서는 "기후가 순조롭지 않고 오곡이 잘 자라지 않으면 이를 모두 왕의 책임으로 돌렸다. 이런 경우에 어떤 때는 왕을 바꾸어야 한다고도 하고 어떤 때는 죽여야 한다고도 했다."고 했다. 이처럼 신조선에서는 내우외환 같은 것은 물론이고 천재지변 같은 것도 대단군의 책임으로 돌렸다. 그래서 하늘이나 인간사에 불행이 생기면 대단군을 대단군으로 인정하지 않고 쫓아내곤 했다.
해부루가 천도한 이 시기는 흉노족 모돈과의 전쟁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아마 패전의 치욕으로 인민의 신앙이 약해져 대단군의 지위를 지킬 수 없었기에 해부루가 아란불과 힘을 합쳐 갈사나 즉 지금의 훈춘 등지로 달아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해모수는 해부루의 동족이자 추모의 아버지다. '삼국유사'에서는 추모가 단군의 자손이라고 했다. 따라서 해모수 역시 대단군의 칭호를 가졌을 것이다. 대단군은 하늘의 대표라는 위상을 갖고 있었다. 해모수는 해부루의 천도를 활용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대단군이라고 자처하고 왕이 되고자 했다. 부여는 '불' 즉 도성이나 도읍을 칭하는 것이니 해부루가 동부여란 표현을 사용하자 해모수는 북부여란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북부여란 표현이 역사서에서 빠지고 없기에 학자들은 동부여와 구별할 목적으로 비로소 해모수의 부여를 북부여라고 불렀다.
해부루가 갈사나 즉 지금의 훈춘으로 천도해서 동부여를 세웟다느 ㄴ점은 앞에서 서술했다. 그렇다면 갈사나는 무엇인가. 고어에서 삼림은 '각' 혹은 '가시'라고 불렀다. 고대에는 지금의 함경도, 길림성 동북부, 연해주 남부에 수목이 울창하여 수천리를 가도 끝없는 삼림의 바다가 이어졌다. 그래서 '가시라'라고 칭했는데 이것은 삼림국이라는 의미다. 가시라를 이두로 표현한 글자가 갈사국, 가슬라, 가서라, 하서량 등이다. 이런 점은 '삼국사기'에 나타난다. 대각국사 의천의 '삼국사'에 나오는 가섭원도 같은 뜻이다.
중국 역사서에서는 '가시라'를 옥저로 표기했다. '만주원류고'에 따르면 옥저는 '와지'의 음역어다. '와지'는 만주어로 삼림이란 뜻이다. 예 즉 읍루는 만주족의 선조로 '삼국지'나 '북사'에서는 읍루의 언어가 조선 열국과 달리 독특하다고 했다. 우리의 '가시라'란 말을 예족은 '와지'로 발음했고 '와지'란 말을 중국인들은 '옥저'로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