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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이라는 명칭의 개념 정립

by $램프 2023. 12. 27.

 

고조선은 크게 네 가지의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 가운데 단군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등을 포괄하거나, 또는 의미가 불확실한 위만조선 이전의 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등을 포괄하는 견해는 고조선이라는 용어를 옛날의 조선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고조선을 단군조선이나 기자조선으로 보는 견해는 특정한 나라 또는 왕조를 의미하는 고유명사로 사용하고 있다.

 

고조선은 한자의 뜻을 그대로 풀이한다면 '옛 조선'이다. 그렇게 보면 단군조선이나 기자조선, 위만조선 모두가 옛 조선이다. 따라서 그것이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보통명사로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런데 고조선을 보통명사로 사용하는 학자들의 고조선사 서술에 많은 혼란이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학자들이 용어를 사용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개념과 내용이 분명해야 한다는 점이다. 단군조선은 토착세력에 의해 건립된 정권이었으며 한사군은 중국 서한의 행정구역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성격은 전혀 다르다. 이와 같이 성격이 전혀 다른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등을 하나로 묶어 서술함으로써 그것들에 대한 인식을 혼란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각 왕조에 대한 내용을 적당히 섞어 서술함으로써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느 왕조를 말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예컨데 그들은 단군조선을 인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고조선의 건국을 서기전 12세기 이후로 본다면 실제로는 단군조선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준왕을 고조선의 왕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준왕은 단군왕검의 자손이 아니라 기자의 후손이며 기자는 서기전 12세기 무렵에 중국의 주나라부터 고조선으로 망명했기 때문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그 근거가 되는 기록을 보자. '후한서'에서는 "옛날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는데 그 후 40여 세대나 지나 조선후 준에 이르러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와 동일한 내용이 '삼국지'에도 보인다.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것은 기자가 그곳에서 사는 것을 공식으로 인정했다는 중국식 표현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준왕은 기자의 40여 세대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이와 동일한 내용이 '위략'에서도 확인된다. 즉, "옛날 기자의 후손인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퇴한 것을 보고 연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 하고 동쪽의 땅을 침략하고자 하자 조선후 또한 스스로 칭하여 왕이라 하고 군사를 일으켜 오히려 연나라를 공격함으로써 주 왕실을 받들고자 하였다. 그 대부 예가 간하니 곧 중지하였다. 예를 서쪽으로 보내어 연나라를 설득하니 연나라도 중지하고 공격하지 않았다. 그 후 자손이 점차 교만하고 포악하여지니 연나라는 곧 장수 진개를 보내어 그 서방을 공격하도록 하여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으니 만번한에 이르러 경계가 되고 조선은 마침내 약화되었다. 진나라가 천하를 병합함에 이르러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았는데 요동에 이르렀다. 이때에 조선왕부가 즉위하였는데 진나라가 그를 칠까 두려워하여 진나라에 거짓으로 복속된 것처럼 하였으나 조회는 수긍하지 않았다. 부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준이 즉위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 문장에 나오는 조선은 기자조선이며 부왕과 그의 아들 준왕은 모두 기자의 후손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중국인들은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을 그냥 조선이라고도 불렀던 것이다. 사료를 읽을 때에 이들을 고조선과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위만이 준왕으로 부터 정권을 빼앗았다면 위만조선 이전의 조선은 기자조선이어야 하는 것이다.

 

역사를 서술하는데 있어 여러 사건이나 사실을 하나로 묶어 하나의 명칭으로 표현하려면 그 명칭에 포함되는 사건이나 사실들은 당연히 같은 성격의 것들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하나의 명칭으로 묶을 수가 없다. 그런데 고조선을 보통명사로 사용한 경우에 고조선에 포함시킨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등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 성격이 다른 국가와 정권 및 행정구역을 하나로 묶어 서술함으로써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이 단군조선과 같은 한민족의 정권이었던 것처럼 인식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기자조선의 준왕이나 위만조선이 단군조선의 뒤를 계승하고 있는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단군조선의 서쪽 변경에 위치해 있었다. 기자는 중국 상 왕실의 후예로서 기국에 봉해졌던 제후였는데 상나라가 주족에 의해 멸망되자 단군조선의 변경이었던 지금의 난하 유역으로 망명하여 단군조선의 거수가 되었다. 이 거수국을 기자조선이라고 부른다.

 

그 후 위만이 중국 서한으로부터 기자조선으로 망명하여 기자의 후손인 준왕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았다. 따라서 위만조선도 난하 유역에서 건국되었다. 위만은 단군조선의 정권을 빼앗을 것이 아니라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기자조선의 정권을 빼앗았던 것이다. 그리고 위만은 서한의 외신이 되어 단군조선을 침략함으로써 단군조선과는 적대 관계에 있었다. 서한 무제는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이 서한의 말을 잘 듣지 않으므로 위만조선을 쳐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서한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켰다. 이것이 한사군이다. 따라서 한사군은 지금의 요서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므로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등의 건국과 설치는 단군조선의 서쪽 변경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한사군, 등을 단군조선을 계승한 후계 세력인 것처럼 서술한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