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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조선 분립 이후의 불조선

by $램프 2024. 1. 18.

 

불조선이 신조선과 연합했다가 연나라에 패배했는데 이때 상실된 영토가 얼마나 되는지 이제 설명하고자 한다. '위략'에서는 "진개가 그 서쪽을 공격하여 2천여 리의 딸을 빼앗으니 만반한을 경계로 삼았다."고 했다. 옛날 학자들은 조선과 연나라의 원래 국경이 지금의 산해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진개가 탈취한 2천여 리가 산해관 동쪽으로 2천여 리였다고 판단하고 만반한을 대동강 이남에서 찾으려 했다. 하지만 이것은 크나큰 착오에 근거한 억측이다.

 

'사기'나 '위략'을 보면 진개가 탈취한 영토는 분명히 상곡부터 요동까지 였다. 그러므로 만반한을 요동 밖에서 찾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한서'에 의하면 요동군에 문, 번한이란 두 현이 있었다. 이 '문, 번한'이 '만반한'이다. 문현이 연혁은 전해지지 않으나 번한현이 지금의 개평 등지이므로 문현도 그 부근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만반한은 지금의 해성, 개평 부근이다.

 

그런데도 만반한을 대동강 이남에서 찾는 것은 왜일까? 만반한은 진개가 침공할 당시의 지명이 아니다. 훗날 진나라, 한나라 때의 명칭이었다. '위략'의 저자가 이것을 진개 당시의 지명으로 잘못 고증했을 뿐이다. '사기'에서 말하는 1천여 리는 신조선이 상실한 영역을 가리키지만 '위략'에서 말하는 1천 여리는 신, 불 조선이 상실한 영역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어양, 상곡 일대는 신조선이 상실한 영역이고 요동, 요서, 우북평 일대는 불조선이 상실한 영토다. 만반한은 한사군의 연혁과 관련성이 밀접한 곳이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연나라왕 희희는 진시황제에게 패해 요동으로 천도했다. 불조선은 이전부터 연나라를 증오했기 때문에 진나라와 동맹하여 연나라를 멸망시켰다. 얼마 후 진시항제는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고 요동에 접근했다. 이로써 불조선과 진나라가 국경을 정하게 됐다. 양국은 오늘날의 헌우락 이남 수백 리를 중립지대로 정하고 양국 인민의 주거를 금지했다. '사기'에서 말하는 진고공지는 이것을 가리킨다.

 

'위략'에서는 당시 불조선왕의 이름이 부라고 했다. 그러나 '위략'처럼 관구검이 실어간 고구려 문헌을 바탕으로 하여 쓴 '삼국지' 및 '후한서'에는 '부'가 기록되지 않았다. '위략'에서 신조선 말엽의 동부여왕 해부루를 '부'오 와전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 여기서는 불조선왕 부를 인정하지 않겠다.

 

기원전 200년에 기준이 불조선왕이 되었다. 그 후 진승, 항우, 유방 등이 모반하여 진나라에서 대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상곡, 어양, 우북평 등지의 조선 유민과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의 중국인들이 난을 피해 귀화했다. 기준은 이들이 서방의 중립지대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 뒤 한나라 고조 유방이 중국을 통일했다. 기준은 한나라와 조약을 체결하여 중립지대는 불조선이 소유하고 헌우락을 국경으로 삼았다. '사기'에서는 "한나라가 흥하고 패수에 이르러 국경을 삼았다."고 했고 '위략'에서는 "한나라가 노관을 연왕으로 삼자 조선과 연나라는 패수에서 경계를 이루었다."고 했다. 두 기록에 나오는 패수는 다 헌우락을 가리킨다. 불조선과 연나라가 만반한을 경계로 삼았다가 만반한 이북으로 물러났으니 두 책의 패수는 다 헌우락을 가리키는 게 명백하다. 옛날 학자들이 대동강을 패수라고 고집한 것도 큰 잘못이지만 최근 일본의 시라코리 구라키치 등이 압록강 하류를 패수라고 한 것도 커다란 망언이다. 패수에 관한 이야기는 앞 절의 만반한과 다음 절의 왕검성과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

 

기원전 194년, 한나라의 연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했다가 실패했다. 그는 흉노로 도망했고 그의 무리인 위만은 불조선에 투항했다. 기준은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관에 임명하고 패수 서부 즉 중립지대 수백 리를 주었다. 그리고 그곳에 이주한 조선 유민과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 사람들을 관리하도록 했다. 이를 발판으로 위만은 군대를 조직했다. 그는 조선, 중국의 망명객들을 모아 비밀결사를 만들고 강력한 병력을 확보했다. 이런 상태에서 위만은 "한나라 군대가 열 개 방면에서 침투하고 있다."는 허위보고를 기준에게 올렸다. 그는 사신을 보내 자신이 기준의 신변을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허락을 받은 위만은 정예병을 거느리고 신속히 이동하여 기준의 도성인 왕검성을 기습했다. 상황이 불리해진 기준은 측근 및 잔여 병력과 함께 바다를 통해 마한연맹의 중심인 월지국을 습격하고 왕의 자리를 빼앗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한의 여러 나라들이 함께 일어나 기준을 멸망시켰다.

 

왕검성은 초대 단군의 명칭을 따서 명명한 이름이다. 단군의 삼경은 지금의 하얼빈, 평양, 개평 동쪽의 세 곳이었다. 세 곳 다 왕검성이란 명칭을 가졌을 것이다. 그중에서 개평 동북이 위만이 도읍한 왕검성이다. '한서'에 나오는 요동군 현독현이 바로 그곳이다. '한서'의 주석에서는 이곳이 "조선왕 위만이 도읍을 둔 곳"이라고 했다. 한편, 기준은 습격한 마한연맹의 왕도가 지금의 익산이라고 하지만 이는 와전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