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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분립 이후의 신조선

by $램프 2024. 1. 17.

 

삼조선이 분립된 지 얼마 뒤 신조선왕의 모갑이 영민하고 용맹스러워 말, 불 두 조선을 다시 연합시켰다. 오늘날의 동몽골 지역을 공격해 선비족을 정복하고 연나라를 공격해 우북평과 어양과 상곡 등지를 다 차지했다. 불리지 때의 고토를 회복한 것이다. 그러자 연나라왕이 크게 두려워했다. 그는 신조선에 해마다 조공을 바치고 신하를 자처하며 태자를 인질로 보냈다.

 

모갑이 죽고 모을이 신조선왕이 된 뒤 연나라 태자가 귀국하여 왕이 되었다. 그는 장군 진개를 왕자로 속여 인질로 보냈는데 모을은 속임수를 깨닫지 못했다. 진개의 민첩하고 영리함에 빠진 모을은 진개를 늘 자기 옆에 두었다. 진개는 모든 군국의 기밀을 탐지한 뒤 연나라로 도망쳐 돌아갔다. 그러고는 연나라 군대를 끌고 가서 신조선을 기습했다. 그는 신, 말, 불 삼국 수비대를 돌파하고 서북 변경, 그러니까 이전에 신조선왕 모을이 점령한 상곡, 어양, 우북평 등지를 탈취했다. 더 나아가 불조선을 기습하여 요서와 요동을 함락했다. 진개는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에 5군을 설치하고 2천여 리의 장성을 쌓아 조선을 견제했다. '사기'의 "연나라의 전성기에 진번조선을 침략해서 복속시켰다"와 '사기'의 "연나라에 진개라는 명장이 있었다. 동호를 습격하여 격파하니 동호가 천여 리나 물러났다. 연나라도 장성을 구축하니 조양에서 양평까지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설치했다."와 "연나라가 이에 장군 진개를 그 서쪽을 공격하여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으니 만반한까지 이르렀다."는 모두 이 일을 가리킨다.

 

그러나 진개가 인질로 간 조선은 신조선인지 불조선이 아니다. 또한 만반한은 불조선이지 신조선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기'에서는 이를 '흉노열전' 및 '조선열전'으로 나누어 다루었다. '위략'은 조선열전에서 이것을 다루었으나 진개가 인질이 된 사실은 다루지 않았다. 

 

조선을 막고자 중국 북방에 장성을 쌓은 나라는 비단 연나라만이 아니었다. 오늘날의 직예 서부의 절반과 하남성 북부와 산서성을 차지한 조나라의 무령왕도 지금의 산서성 북부에 장성을 쌓았다. 이 장성은 조선과 조선 속국인 담림, 누번 등으로 인해 쌓은 것이다. 지금의 섬서성을 차지한 진나라의 소왕도 장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의거를 멸하고 흉노를 막기 위해서였다. 의거는 본래 조선의 한 종족으로 지금의 감숙성으로 이주한 뒤 성곽과 궁궐을 건축하고 농업을 장려하여 상당한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의거는 병력으로 진나라를 압박하기도 했다. 그런데 진시황의 고조모인 선태후는 절세의 미인이었다. 그는 의거가 진나라를 멸망시킬까 두려워하여 의거왕을 유혹하고 통정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마침내 의거왕을 진나라로 끌어들여 살해하고 두 아들까지 죽인 뒤 그 나라를 기습하여 멸망시켰다.

 

신조선이 연나라, 조나라와 투쟁하는 사이에 진나라가 강성해졌다. 마침내 진나라가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 연나라, 제나라, 초나라 등을 멸망시켰다. 그러자 한나라의 장량은 망국의 한을 품고 조선에 들어와 구원을 요청했다. 신조선왕 '모병'은 역사인 여씨를 소개했다. 여씨는 진시황제의 순행을 틈타 120근짜리 철퇴를 들고 기회를 엿보았다. 그는 지금의 하남성에 속한 양무현 박랑사에서 진시황제의 마차를 공격했다. 하지만 실수로 수행원의 마차를 부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사기'에서는 장량이창해군에게 역사를 요청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창해를 강릉으로 보고 창해군은 강릉의 군장이며 역사인 여씨는 강릉 출신이라 했다. 그러나 창해는 동부여의 별칭으로 동부여의 두 분파는 각각 북갈사와 남갈사에 도읍을 두었는데 창해는 이들 중 하나다. 강릉이 창해라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다. 

 

얼마 뒤 진시황제는 동북방 조선과 서북방 흉노를 경계하여 연나라, 조나라, 진나라의 고토에 있던 장성을 연결하고 이를 확대했다. 그는 전 중국의 인민을 요역에 동원하고 장군 몽염에게 30만명을 거느리고 감독하도록 했다. 동양 역사에서 유명한 만리장성은 이렇게 완성됐다. 하지만 기원전 210년에 죽은 진시황제에 이어 2세 황제 영호해가 즉위한 이듬해에 진승, 항우, 유방 같은 혁명 군웅들이 봉기했다. 이들은 마지막 황제인 영자영 때에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두산은 이렇게 논평했다. "진나라의 위력이 유사 이래 전례가 없을 정도로 팽창하여 온 천하가 진시황제를 천신으로 떠받드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난데없이 나타난 벽력같은 철퇴 하나가 진시황데의 영혼을 빼앗고 6국 유민들의 적개심을 선동했다. 진시황제의 시신이 땅에 들어가기도 전에 진나라에 맞선 깃발이 사방에서 휘날렸으니 이는 창해역사의 공로가 아닐 수 없다."

 

중국에서 항우, 유방 등의 내란이 8년간 계속되는 동안 신조선왕 '모정'은 서방으로 출병하여 상곡, 어양 등지를 회복하고 동몽골 일대의 선비족을 복속시켜 국위를 회복했다. 그러나 그 자손 대에 흉노족 연제모돈의 난을 만나 국력이 쇠약해지고 말았다.

 

흉노족은 조선과 언어 계통이 같고 조선처럼 수두를 신봉하여 조선의 속민이 된 종족이다. 이들은 오늘날의 몽골 등지에 흩어져 목축과 수렵에 종사하고 천성적으로 침략을 즐겨 중국 북부를 자주 유린했다. 신조선에 대해서도 발란과 항복을 되풀이 했다. 그런 상태에서 기원전 209년에 연제두만이 흉노 선우가 됐다. 그는 장자인 모돈을 미워하고 작은 아들을 사랑했다. 그러다가 결국 모돈에게 죽임을 당했다. 모돈은 그 뒤를 이어 선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