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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과 중국의 정치 교섭

by $램프 2024. 1. 11.

 

고조선과 중국의 정치적 교섭은 매우 일찍부터 이루어졌다. 고조선은 일찍이 중국의 제순시대에 중국과 정치적 교섭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나타난다. '죽서기년'에는 제순 25년에 식신씨가 내조하여 활과 화살을 공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순 25년, 즉 서기전 2209년 무렵에 숙신은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정치적 교섭을 가졌던 것이다.

 

고죽국도 일찍이 중국과 교섭을 가졌다. 상시대에 고죽국의 왕자백이와 숙제가 상나라의 서방에 있었던 주를 방문했다. '죽서기년'에 제신 21년에 백이와 숙제가 고죽으로부터 주에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나라의 마지막 왕인 제신 21년에 고죽국의 왕자인 백이와 숙제가 주를 방문했다는 것인데 이 내용은 '사기'에 고죽국의 왕자 백이와 숙제가 주의 문왕이 착하여 노인들을 잘 받든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보기 위해 주를 찾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과 일치한다.

 

숙신은 서주의 무왕과 성왕 때에도 사신을 파견했다. '죽서기년'에 "무왕 15년 숙신씨가 손님으로 왔다. 성왕 9년에 숙신씨가 조근을 오니 왕은 영백을 시켜 '숙신씨의 명을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주 무왕 때의 숙신 방문에 대해 '국어'에는 옛날 무왕이 상나라를 이겼을 때 도가 구이와 여러 오랑캐 나라에 각각 그 지방의 재화를 가지고 와서 바치도록 하고 그들의 직분을 잊지 않도록 했다. 이때 숙신씨는 나무화살과 돌화살촉을 가져왔는데 그 길이가 여덟 치나 되었다."라고 하여 한결 더 구체적인 설명을 하고 있으며 성왕 때의 숙신씨 방문에 대해서는 '상서서'에 "성왕이 동이의 정벌을 끝내니 식신이 와서 축하했다. 왕은 영백으로 하여금 회식산지병을 짓도록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동일한 내용이 '사기'에도 실려 있다. 서주 무왕은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 그 지역을 상의 왕자인 무경 녹부가 통치하도록 하고 그의 동생들인 관숙, 채숙, 곽숙에게 무경 녹부를 감독하게 했다. 그런데 무왕은 주족의 본거지인 호경으로 돌아온 지 오래지 않아 사망했다. 성왕이 즉위했으나 나이가 어리므로 주공 단이 섭정을 하게 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관숙, 채숙, 곽숙 등이 무경 녹부와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성왕과 주공은 3년여에 걸친 전쟁 끝에 동방 지역을 평정했다.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내용은 이런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이때 숙신의 사신이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서주를 방문했다는 것이다.

 

고조선의 거수국들은 서주의 성주대회에도 참가했던 것으로 기록에 나타난다. 서주의 역사를 기록한 '일주서'에는 중국의 동북쪽에 거주하던 직신, 예, 양이 , 양주, 발인, 유인, 청구, 고이, 고죽 등의 대표가 성주대회에 참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주가 건국된 후 기반이 잡히기도 전에 무왕이 갑자기 사망하고 어린 성왕이 즉위하여 주공 단이 섭정을 하게 되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관숙선, 채숙 도, 곽숙 처는 상나라 왕자인 무경 녹부와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주공 당은 3년여에 걸친 전쟁 끝에 반란을 평정한 후 동부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낙읍을 건설하고 그곳을 성주라 불렀다. 그리고 그곳에서 각국의 대표를 초청하여 '성주대회'를 열었다. 따라서 성주대회는 서주의 위력을 만방에 알리는 행사였다.

 

위의 기록들에 나오는 숙신, 예, 양이, 양주, 발, 유, 청구, 고구려, 고죽 등은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다. 그러므로 고조선은 그의 거수국들을 통해 일찍이 건국 초기인 서기전 2209년 무렵부터 계속해서 중국과 매우 우호적인 관계에서 정치적 교섭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여러 거수국 가운데 이들이 중국과 교섭을 가진 것으로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그들이 중국과 가까운 지금의 요서 지역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조선과 중국의 교섭은 계속되어 중국의 서주 말기인 선왕 때에는 고조선의 단군이 직접 서주 왕실을 방문하여 융숭한 접대를 받았던 것으로 전해온다. 서주 선왕 때의 작품인 '시경'은 한후라는 인물이 저수 왕실을 방문하여 환대를 받은 내용인데 여기에 나오는 한후는 고조선은 단군을 중국식으로 부른 것임을 필자는 밝힌 바 있다. 그러므로 당시의 상황을 알기 위해 내용을 보면 "한후가 조근와서 그 큰 홀을 들고 들어와 왕을 뵙는다. 왕은 한후에게 훌륭한 무늬 있는 깃대와 기장목에 대자리, 수레 가리개, 무늬 새긴 멍에, 검은 곤룡포, 붉은 신, 고리 달린 말 배띠, 무늬 있는 말 당로, 가죽 댄 수레 앞턱나무, 호피 덮개, 고리 달린 고삐, 쇠고리 등을 내리셨다. 한후께서 아내로 맞으신 분은 분왕의 생질 되시는 궐부의 따님, 한후는 아내 맞으시려고 궐씨의 마을에 가셨다. 수많은 수레를 덜컹거리고 말방울 소리 딸랑거리며 그 빛 더없이 밝으셨다. 여러 누이들도 따라오는데 구름처럼 아름답고 많기도 해라. 한후가 그들을 돌아보니 그 문 안에 찬란하게 가득 차 있다. 한후는 선조들이 받으신 천명으로써 모든 오랑캐 다스리신다. 왕은 한후에게 추와 맥까지도 내려주셨다. 북쪽에 있는 나라들을 모두 다맡아 그 지역의 어른이 되셨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 시는 서주 선왕 때의 작품이라고 전해오므로 그것을 인정한다면 그 내용에서 다음 사실이 확인된다.

 

고조선과 서주는 매우 우호적이엇으며 서주 왕실은 단군의 방문을 매우 환대했다는 사실이다. 서주 왕실이 단군을 환대한 것은 당시 국제사회에서 고조선 위치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조선의 단군이 서주 여왕의 생질녀를 아내로 맞이했다는 사실이다. 서주 왕실에서 여왕의 생질녀를 단군에게 출가시킨 것은 양국의 우호를 돈독하게 하기 위한 정치적 의미가 매우 강했을 것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