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사화에 의하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환웅은 바람을 관장하는 풍백, 비를 관장하는 어른, 구름을 관장하는 운사를 거느리고 곡물과 생명, 질병, 형벌, 선악 등과 사람의 360여 가지일을 주관하며 세상에 살면서 그곳을 합리적으로 진화시켰다. 이것은 단군에 의해 고조선이 건국되기 훨씬 전 상황을 전하는 것이다.
환웅이 바람을 관장하는 풍백, 비를 관장하는 우사, 구름을 관장하는 운사를 거느렸다는 내용은 당시 사람들에게 기후가 매우 중요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환웅이 주관했던 여러 일 가운데 농사가 가장 먼저 언급된 것과 연결시켜 생각해볼 때 당시 사회는 농업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농업에는 기후와 절기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그것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한 관심은 천문학과 기상학의 발달을 가져오게 된다 환웅은 사람의 360여 가지 일을 관장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1년의 360여 일을 뜻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고조선이 건국되기 훨씬 전에 360여 일을 1년 단위로 하는 달력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기상에 대한 관심은 고조선시대를 거쳐 여러 나라 시대로 이어졌다. '후한서'에는 "새벽에 별자리의 움직임을관찰하여 그해에 풍년이 들 것인지 흉년이 들 것인지를 미리 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동일한 내용이 '삼국지'에도 보인다. 예는 원래 고조선의 거수국이었으므로 이런 풍속은 고조선으로부터 이어졌을 것이다. 별자리의 움직임을 보고 판단한 풍년과 흉년에 대한 경과가 얼마나 정확했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러한 관찰을 통해 기상 변화는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며 천문학의 발달도 가져왔을 것이다.
고조선에 수준 높은 학문과 과학기술이 있었을 것임을 추측하게 하는 기록이 있다. '후한서'에 "왕경은 자가 중통인데 낙랑군 염한 사람이다. 8세조인 중은 본래낭야군 불기 사람이다. 도술을 좋아하고 천문에 밝았다. 여씨들이 세상을 어지럽히자 제애왕 양은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면서 여러 차례 중에게 문의했다. 제북왕 흥거가 반기를 듦에 이르러 중에게 병사를 맡기려 하자 중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곧 바다를 항해하여 동쪽의 낙랑 산중으로 도망하여 그곳에서 살았다. 왕경은 어려서 역학을 배우고 많은 책들을 널리 보기에 이르렀으며 또 천문과 술수에 관한 것을 좋아했는데 침착하고 생각이 깊어 기술과 재주가 많았다. 황제가 사공 복공의 관청으로 불렀다. 그때 왕경이 치수에 능하다고 추천하는 사람이 있어 현종은 명령을 내려 장작일자 왕오와 더불어 준의거를 건설하도록 했다. 왕오는 왕경의 저수지와 물길 만드는 방법을 채용하니 물로 인한 피해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왕경은 낙랑군 출신으로 역학을 비롯하여 학문의 폭이 넓었고 천문과 술수는 물론 토복과 같은 과학기술에도 밝아 준의거를 건설하는 데 공로가 컸다는 것이다.
왕경은 서한 말부터 동한 초에 걸쳐 활동했던 사람으로 그 후에도 수리 공사 등에 많은 공로를 세웠고 서주지사, 여강태수 등의 관직에 올랐다. 낙랑군은 패망한 위만조선 땅에 설치되었으므로 서한의 변방이었다. 그러한 변방 출신인 왕경이 폭넓은 학문과 과학기술 수준이 그만큼 높았음을 의미한다. 왕경이 8세조인 왕중은 도술을 좋아하고 천문에 밝은 사람으로 낭야군에서 낙랑군으로 이주했다고 하므로 그러한 가학이 왕경에게 전해졋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왕중의 학문이 8세손인 왕경에게 얼마나 충실히 전수되었을 것인지도 의문이며 그러한 가학만으로 왕경이 동한의 중앙정부에서 두각을 나타낼 정도의 수준에 이를 수 었었을 것인지도 의문스럽다.
왕경이 그러한 높은 학문과 과학기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대대로 이어진 가학의 덕도 있었겠지만 당시 낙랑 지역의 학문과 과학기술 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왕경의 8세조 이상의 조상들이 살았던 낭야군은 황하 중류 유역이 아니라 중국의 동부 해안 지역인 산동성이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모든 지역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중국 내라고 해도 산동성이나 하북성 지역은 서한이나 동한의 중심부였던 황하 중류 유역보다는 거리가 가까운 만주나 한반도와 교류가 많았다. 따라서 왕경의 조상들이 살았던 낭야군의 문화 내용과 수준은 고조선의 문화 내용이나 수준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왕중이 낙랑 지역으로 이주했던 시기는 제북왕 흥거 때인데 제애황 양과 제북왕 흥거는 모두 제도해왕비의 아들들로 서한 고조의 손자였다. 위 인용문의 내용으로 보아 왕중이 이주한 시기는 서한 고조가 사망한 후 여후 일파가 정권을 장악했던 때이므로 위만조선 초기에 해당한다. 왕경 일가는 이때부터 위만조선에서 살았던 것이다. 위만조선의 지배층에는 서한으로부터의 망명인이 포함되어 있었고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그곳에 한사군이 설치된 후에는 낙랑군에 상당히 많은 서한인들이 이주해 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왕경이 살았던 시기에 낙랑군의 학문과 과학기술 수준이 높았던 것은 이런 이주민을 통해 서한의 문화가 전달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한 입장에서 보면 낙랑군은 변방이었고 이민족이 사는 곳이었다. 그곳에 파견되었던 서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권리나 군인들이었을 것이며 이주민들도 문화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나 상인들이 주류를 이루었을 것이다. 서한 중앙에 거주하던 수준 높은 학자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왔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