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이라는 명칭은 한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사에 처음 등장한 국가의 명칭이 조선이었고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의 낙랑군 조선현 등이 모두 조선이라 불렸다. 그리고 근세에 이성계가 세운 왕조의 명칭도 조선이었다.
이와 같이 조선은 한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명칭이기 때문에 한국사 학자들이 자주 언급하는 명칭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조선이라는 명칭이 갖는 개념이 시대에 따라 또는 같은 시대라도 용례에 따라 어떠한 차이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검토된 바가 없다. 그러한 관계로 한국고대사에 나타난 조선을 모두 동일한 개념으로 파악하여 처리함으로써 한국고대사에 대한 인식과 체계에 큰 잘못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예컨대 고조선이라는 명칭을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포함한 개념으로 사용한 것이라든가 고조선의 지리적 위치를 한사군의 낙랑군 내에 있던 조선현과 동일한 지역으로 본 것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혼란과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필자는 조선이 언급된 기본 사료의 용례에 따라 조선이라는 명칭이 갖는 지리적 개념을 검토 분석하여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혀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 없이는 조선이라는 명칭의 동일성 때문에 서로 다른 역사의 사실이나 상황이 같은 것으로 잘못 파악되는 등 한국고대사 인식에 혼란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세조선의 경우에는 그 명칭으로 인해 역사 체계나 역사 인식에 혼란을 주거나 잘못이 일어나고 있지 않으므로 이 연구 범위에서 제외될 것이다. 따라서 필자의 고찰 범위는 고대사에 나타난 조선으로 한정한다.
고대의 조선을 고찰함에 있어 조선이라는 명칭이 갖는 의미와 유래 등도 연구 대상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차후에 다루기로 하고 고대 문헌에 나타난 '조선'들의 지리적 위치를 고증한 후 그 성격과 상호 관계 등을 밝히고자 한다. 논리 전개와 이해의 편의를 위해 중국 문헌에 가장 일찍 나타난 조선의 지리적 위치를 고증하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중국 문헌에 나타난 가장 이른 시기의 조선은 서주 초기에 기자가 망명했다는 조선이다. 흔히 중국 문헌 가운데 가장 먼저 조선을 언급한 것은 '관자'라고 소개되고 있다. '관자'는 전국시대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보다 이른 시기에 편찬된 중국 문헌에는 조선을 언급한 내용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관자'가 조선에 대해 가장 먼저 언급한 중국 문헌이라는 것은 옳다. 그러나 '관자'에는 춘추시대의 패자였던 환공과 관중의 대화 내용 가운데 조선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이 조선은 춘추시대의 조선이다.
그런데 '사기'와 '상서대전'에는 서한시대에 편찬되었으므로 '관자'보다는 편찬 연대가 늦다. 그러나 기자는 서기전 12세기 무렵에 상과 서주 교체기의 인물로서 환공이나 관자보다 훨씬 앞선 시대의 사람이다. 따라서 기자와 관계를 가지고 나타난 '사기'와 '상서대전'의 조선은 '관자'에 나타난 조선보다 그 연대가 훨씬 앞서는 것이다. '사기'를 보면 "이에 무왕은 바로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으나 신하는 아니었다" 라고 했고 '상서대전'에는 "무왕은 은을 이긴 후에 공자 녹부로 하여금 은을 계승하게 하고 기자를 풀어주었다. 기자는 주나라에 의하여 풀려난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어 조선으로 도망하였다. 무왕이 그 소식을 듣고 그를 조선에 봉하였다. 기자는 이미 서주로부터 봉함을 받았는지라 신하로서의 예가 없을 수 없어서 무왕 13년에 내조하였는데 무왕은 그가 내조한 기회에 그에게 홍범에 대해 물어보았다" 라고 기자가 조선으로 간 경위를 '사기'보다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사기'와 '논어' 등의 중국 문헌에 의하면 기자는 상 말기의 어진 인물로 상 왕실의 후예였다. 그런데 상의 마지막 왕인 제신에게 바른 정치를 간하다가 감옥에 갇혔다. 때마침 주족이 상을 멸망시키고 서주가 건국되자 기자는 서주의 무왕에 의해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기자는 조국이 망하고 자신은 서주의 무왕에 의해 구출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서주의 강역을 벗어나 조선으로 망명했다는 것이다. 위에 인용된 '사기' 및 '상서대전'의 내용은 이러한 기자의 조선 망명을 말해준다. 위 내용에서 기자가 조선으로 간 것을 듣고 무왕이 그를 조선에 '봉했다'고 한 것은 무왕이 기자의 조선 망명을 서주에 대한 배반으로 여기지 않고 조선에 거주하는 것을 공식 인정했다는 중국식 표현이다.
중국 문헌에 기록된 기자의 조선 망명 내용은 한국사 학계에서 두 가지 다른 반응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를 통관한 견해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고조선의 통치자였던 단군들의 뒤를 이어 통치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기간을 후조선 또는 기자조선이라고 불렀다. 이 견해는 중국을 종주국으로 받들던 모화, 사대의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기자 같은 어진 인물이 고조선의 통치자가 되었다면 한민족도 문화민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앞의 인용문 내용에서 확인되듯이 중국 문헌의 기록에는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한 것으로 되어 있을 뿐, 고조선의 통치자가 되었다는 내용은 없다.
다른 하나는 대일항전시대 이후 주류를 이루었던 견해로 기자가 조선으로 이주했다는 것은 중국인들이 꾸며낸 거짓 이야기에 불과할 것으로 본 것이다. 이 견해는 일본과 한국의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통용되었다. 일본 학자들은 고대에 한국의 임나일본부를 통해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그들이 조작한 내용 강조하기 위해 기자의 조선 망명설이나 기자의 고조선 통치설을 부인했던 것이다. 한국 학자들은 기자가 아무리 어진 인물이었다 하더라도 중국의 망명객이 한민족을 통치했다는 것은 민족 자존심으로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본학자들도 부인한 것이므로 굳이 인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서 재고해봐야 할 것은 역사는 사료에 의해 복원되는 것인데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했다는 '사기'나 '상서대전' 등의 기록을 부인해도 괜찮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