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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사람들의 의식주와 풍속

by $램프 2024. 1. 8.

 

옷차림은 사람의 생활에서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고조선에는 이미 매우 발달된 옷을 만들어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사실은 출토된 유물과 문헌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함경북도 산봉군 굴포리 서포항 유적의 청동기문화층에서 출토된 흙으로 만든 남자 인형은 모두가 서 있는 형태인데 아랫도리가 넓게 퍼져 있다. 이를 보아 고조선 남자들은 두루마기 같은 겉옷을 입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지'에는 "부여사람들은 국내에 있을 때의 의복은 흰식을 숭상하며 흰 베로 만든 큰 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고 했는데 부여는 원래 고조선의 거수국이었으므로 부여인들이 입었던 큰 소매 달린 도포는 고조선 때부터 입었던 두루마기 같은 겉옷이엇을 것이다.

 

'후한서'와 '삼국지'에는 "예 사람들은 남녀 모두 곡령을 입니다. 남녀가 모두 곡령을 입는데 남자는 넓이가 여러 치 되는 은화를 옷에 꿰메어 장식한다."고 했는데 곡령은 원령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목둘레를 동글게 한 옷깃을 말한다. 이 기록은 고조선이 붕괴된 후 예의 풍속에 관한 것이지만 예는 원래 고조선의 거수국이었으므로 이런 의복은 고조선의 것을 계승했을 것이다. 이를 보아 고조선 사람들은 목둘레의 깃을 둥글게 만든 옷에 은화를 장식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한민족은 일찍이 고조선시대부터 곡선을 이용한 아름다운 옷을 만들어 입었던 것이다. '후한서'에도 "고구려 사람들은 그들의 공공 모임에 모두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고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고 했는데 고구려도 원래 고조선의 거수국이었으므로 이런 풍속은 고조선부터 이어져 내려왔을 것이다. 이를 종합해보면 고조선 사람들은 미의식이 매우 높은 복식 생활을 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고조선 사람들은 모자를 즐겨 썼던 것으로 보인다. 서포항 유적의 흙인형 머리 위는 수평을 이루어 양쪽 옆으로 넓게 퍼지고 양쪽의 모서리는 각을 이루고 있어 고깔을 쓴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함경북도 무산군 무산읍 범의구석 유적 청동기문화층에서 출토된 남자 조각품은 머리 위가 둥그스름하게 높이 올라가 있어 둥근 모자를 쓴 것처럼 보인다. '후한서'에는 고구려의 대가와 주부는 모두 책을 쓰는데 중국의 관책과 같기는 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소가는 절풍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과 같았다."고 했는데 고구려도 원래 고조선의 거수국이었으므로 고구려인들이 착용했던 이런 모자는 고조선 때부터 사용했을 것이다. 범의구석 유적에서 출토된 남자 조각상이 쓴 모자는 책이었을 것이며 서포항 유적에서 출토된 흙인형이 쓴 모자는 절풍이었을 것이다.

 

고조선 사람들은 여러 가지 치렛거리를 사용했다. 함경북도 북청군 토성리의 청동기 유적에는 청동으로 만든 토시 한 쌍이 출토되어 고조선인들이 복식에 상당히 정성을 들였음을 알게 해준다. 그동안 출토된 치렛거리를 보면 구슬류와 단추, 고리 등 옷에 달아메는 장신구류와 목걸이, 귀고리, 팔찌, 가락지 등 몸에 걸거나 끼는 것들이 있다. 치렛거리는 종류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재료도 다양하고 기교도 세련되었다. 예컨데 구슬을 만든 재료를 보면 청동을 비롯해 푸른색, 자색, 보라색 흰색 등의 병옥과 천하석, 공작성, 구리 조개껍질, 뼈, 흙 등 자연계에서 얻은 재료뿐만 아니라 사기물과 유리 등 인공적으로 만든 재료도 이용하여 구슬을 만들었다. 그 모양도 다양하여 둥근구슬, 대롱구슬, 7면구슬, 장고구슬, 대추구슬 등이 있었다.

 

고조선의 치렛거리는 종류도 다양하고 수량도 많았으며 매우 정교했는데 기본적으로는 이전 시대의 기술과 품격을 계승하고 있었다. 고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요령성 북표현 풍하 유적에서 출토된 진한 녹색의 옥패, 복숭아 모양의 우윳빛 석벽, 원형의 납작한 송록석 구슬, 관 모양의 뼈구슬, 뼈비녀 등과 풍하 유적과동일한 시기의 하가점 유적 하층에서 출토된 옥종, 옥고, 옥패식 등은 그전의 홍산문화에서 보이는 제작 기술과 예술 품격을 계승하고 있었다.

 

고조선 중기에 해당하는 하가점 유적 상층에서 출토된 치렛거리를 하층에서 출토된 것과 비교해보면 청동제의 치렛거리가 대량으로 증가하고 금 제품도 출현한다. 그리고 남녀의 치렛거리가 달랐는데 남자는 동물 문양이 있는 동패가 위주였고 여자는 구슬류가 주류를 이루었다. 치렛거리는 지역에 따라 재질, 종류, 기술 수준 등에 차이가 보인다. 만주의 경우 북부에서는 옥이나 돌이, 남부에서는 청동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런 현상은 지역에 따라 재료를 구할 수 있는 조건과 경제 수준이 달랐기 때문에 생겨났을 것이다.

 

고조선인들은 이상과 같은 치렛거리들로 몸을 치장했었는데 '후한서'에는 고구려, 예, 한 사람들의 복식에 대해 "고구려 사람들은 그들의 공공 모임에 모두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고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 예 사람들은 삼을 심고 누에를 기르며 길쌈을 할 줄 안다. 마한 사람들은 양잠을 할 줄 알며 길삼하여 베를 짠다."

 

"한 사람들은 구슬을 귀중히 여겨서 옷에 뀌메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한다. 그들은 대체로 머리를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놓으며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짚신을 신는다."고 했다. 이 기록은 고조선이 붕괴된 후의 고구려, 예, 한 등에 관한 것이지만 이들은 원래 고조선의 거수국이었으므로 그들의 이런 복식 풍속은 고조선을 계승했을 것이다.

 

고조선에서는 옷감으로 삼베, 모직, 명주 등이 생산되었다. 옛 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고조선에서는 비휴 가죽이나 표범 가죽, 말곰 가죽 등과 모피 의류도 발달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농업을 기본으로 하여 생활했던 그들에게는 당연히 식물성 섬유로 짠 천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고조선에서 삼베를 옷감으로 이용했음은 출토된 유물에 의해 확인되었다. 토성리의 청동기 유적에서는 천 조각이 출토되었다. 이 천 조각은 집자리에서 청동기와 함께 출토되었는데 청동기를 싸서 묻었던 것이다. 발굴자들은 출토된 천의 재료나 그 기술 등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유물 사진으로 보아 굵은 실로 짠 삼베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고조선인들이 식물 섬유를 이용하여 천을 짜 옷을 만들어 입었음을 알게 해주는 실물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