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에는 부여, 고죽, 고구려, 예, 맥, 추, 진번, 낙랑, 임둔, 현도, 숙신, 청구, 양이, 양주, 발, 유, 옥저, 기자조선, 비류, 행인, 해두, 대마, 구다, 조나, 주나, 진, 한 등의 거수국이 있었던 것으로 필자는 공증한 바 있다. 이 가운데 진은 고조선의 중심이 되는 거수국으로서 고조선 최고 통치자였던 단군의 직할국이었다. 그 밖의 각 지역 거수국들은 그곳의 거수들이 통치했는데 단군은 이런 거수들을 거느리는 방법으로 고조선의 각 지역을 간접 통치했다. 따라서 고조선은 통치구조의 측면에서 보면 '거수국제 국가'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고조선의 거수국들은 여러 마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고조선이 건국되기 전에는 각 지역의 마을연맹체로서 고을나라였다. 이런 고을나라들이 고선족의 고을나라에 복속되어 고조선이라는 큰 나라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조선은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산재해 있던 수많은 마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고조선은 마을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마을집적국가' 또는 '마을집적사회'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고조선이 마을들로 구성되어 있었음은 다음과 같은 기록들에서 확인 된다. '사기'에는 위만이 나라를 세운 후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을 말하면서 "효혜와 고후 때를 맞이하여 천하가 처음으로안정되니 요동태수는 바로 위만을 외신으로 삼기로 약속하고 국경 밖의 오랑캐들을 막아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며 여러 오랑캐의 군장들이 들어와 천자를 알현하고자 하거든 막지 말도록 했다. 천자가 이를 듣고 허락했다. 이로써 위만은 군사적 위엄과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소읍들을 침략하여 항복받으니 진번,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되어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고 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위만은 위만조선을 세운 후에 중국 서한의 혜제와고후 때에 이르러 서한의 외신이 되어 군사적, 경제적 기반을 닦고 주변을 침락하여 영토를 확장했는데 그때 주변의 소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을 받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읍은 마을을 말한다.
중국의 초기 문자인 갑골문에서 읍 자는 사각형 밑에 사람이 앉아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갑골학자들은 사각형은 지역을 나타내고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은 사람이 거주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읍 자는 사람이 거주하는 지역, 즉 마을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오늘날에는 읍이 사람이 많이 사는 소도시나 고을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고대에는 일반 촌락, 즉 마을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위에 인용된 '조선열전' 기록은 위만이 나라를 세우고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작은 마을들을 쳐서 복속시켰음을 알게 해준다. 그런데 위만의 고조선의 서부 변경이었던 지금의 난하 하류 동부 유역에서 기자의 후손으로 고조선의 거수로 있던 준의 정권을 빼앗아 위만 조선을 세우고 서한의 외신이 되어 영토를 확장했기 때문에 당시에 위만이 쳐서 복속시킨 마을들은 고조선의 마을들이었다. 이로 보아 고조선에는 마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조선열전'에 의하면 당시에 진번과 임둔도 위만에게 복속되었은데 진번과 임둔은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 그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될 때 한사군의 군명이 되었다. 그러므로 진번과 임둔은 고조선에 속해 있던 지역의 명칭으로 그 지역은 하나의 군이 설치될 정도로 상당히 넓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마을이 아니었고 그 안에 여러 개의 마을이 있었을 것이다.
진번과 임둔군은 하사군이 설치된 지 불과 26년 만에 폐지되어 그 규모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함께 설치되었던 낙랑군과 현도군의 규모는 기록이 남아 있으므로 이를 통해 당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한서' 기록에 의하면 낙랑군에는 조선현 등 25개 현이 있었는데 6만 여호에 40만명의 주민이 있었고 혀도군에는 고구려현 등 3개 현이 있었는데 4만호에 22만명이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낙랑군의 1개 현에는 약 2,513호에 1만 6,270여 명이 살았고 현도군 1개 현에는 1만 5,002호에 7만 3,948이 살았다는 것이 된다. 한반도와 만주는 농업사회였기 때문에 이런 많은 인구가 한곳에 모여 도시를 이루고 살았다고는 볼 수 없다. 다시 말하면 현은 도시가 아니라 여러 마을의 집합체인 고을이었던 것이다. 하나의 마을을 30호 정도로 상정한다면 낙랑군의 1개 현에는 84 정도의 마을이 있었고 현도군의 1개 현에는 500개 정도의 마을이 있었다는 것이 된다.
진번군가 임둔군에도 많은 마을로 구성된 현이 있었을 것이며 그 조직은 낙랑군이나 현도군과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낙랑, 임둔, 진번, 현도의 한사군은 위만조선이 건국되기 전에는 고조선의 영토였다. 따라서 각 지역의 거주 인구나 마을의 크기는 후대와 다소 차이가 있었을 것이지만 고조선에도 각 지역이 여러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런 사실은 고조선이 서양의 그리스와 같은 도시국가가 아니라 그 사회 구조의 기초가 마을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고조선이 붕괴된 후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한사군과 병존해 있던 부여, 고구려, 읍루, 동옥저, 동예, 한 등 여러나라의 상황을 전하는 '후한서'에는 위의 여러나라가 마을들을 그 사회의 기초로 하고 잇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 기록을 보면 "부여는 여섯가축으로써 관직의 이름을 만들었는데 마가, 우가, 구가, 등이 있었으며 그 읍락은 모두 제가에 속해 있었다. 군장은 없었고 그 읍락에는 각각 대인이 있었다. 땅은 비옥하고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오곡이 잘 자라고 농사짓기에 적합하다. 읍락에는 장수가 있었다. 읍락을 함부로 침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때마다 벌을 주어 노예와 소, 말을 부과하는데 이를 책화라 했다. 마한사람들은 읍락에 섞여 사는데 또한 성곽이 없다. 진한에는 여러 작은 별읍이 있는데 각각 거수가 있다."고 했다. 고대에 읍이 마을을 의미 했음은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읍락도 역시 마을을 뜻한다. 한 집단에서 떨어져 나가 마을을 이루었다는 의미를 지닌 '락'자가 '읍'자와 결합하여 읍락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는데 읍락 역시 마을을 뜻했던 것이다. 따라서 위 '동이열전' 기록들은 부여, 고구려, 읍루, 동옥저, 동예, 한 등에 마을들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