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주민은 경제 면에서 크게 두 부류로 나눌수 있다. 한 부류는 생산활동에 종사하지 않은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생산활동에 종사한 사람들일 것이다. 생산활동에 종사하지 않은 사람은 지배 귀족들이었을 것이며 생산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피지배 신분이었을 것이다. 고조선에 생산활동에 종사하지 않은 지배 귀족들이 있었음은 다음 기록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삼국지'에 "그 나라의 대가들은 농사를 짓지 않으므로 앉아서 먹는 사람이 만 여명이나 된다. 하호들이 먼 곳에서 양식, 고기, 소금을 운반해서 그들에게 공급한다."고 했다. 이 기록은 고조선이 붕괴된 후의 고구려 상황을 말한 것이지만 고구려는 원래 고조선의 거수국이었고 이런 상황은 고대국가에서 보편적으로 있던 것이므로 고조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위의 내용에서 지배귀족인 대가는 노동을 하지 않고 소비생활을 했으며 하호는 그들을 위해 봉사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지배귀족이 농사를 짓지 않았음은 고고 발굴 결과로도 확인된다. 요령성 여대사에 위치한 강상무점과 누상무덤은 서기전 8~6세기 무렵의 것으로 고조선 후기에 속하는데 규모가 매우 크고 순장인이 많을 뿐만 아니라 부장품도 매우 많았다. 이를 보아 이 무덤들이 고조선의 지배귀족 무덤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농구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강상무덤에서는 청동기, 석기, 골각기 등 874점이 출토되었는데 무기와 장신구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농구는 단 한 점도 없었다. 누상무덤 출토 유물도 무기와 장신구가 주류를 이루었고 농구는 없었다. 요령성 금현에 위치한 와룡천 무덤은 강상무덤이나 누상무덤보다 규모가 훨씬 작고 소수의 순장인이 있어 신분이 낮은 귀족의 무덤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무덤에서도 농구는 출토되지 않았다.
그리고 요령성 심양시에 위치한 서기전 6~5세기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어 고조선 후기 속하는 정가와자무덤은 순장인이 없는 무덤이었지만 무덤의 규모나 출토된 유물로 보아 지배 귀족의 무덤일 것으로 보이는데 청동 무기와 장신구, 마구 등이 출토되었을 뿐 농구는 보이지 않았다. 정가와자무덤 유형의 무덤은 지금의 요서 지역과 요동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데 남쪽으로는 요동반도의 여대시 지역의 요동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데 남쪽으로는 요동반도의 여대시 지역의 해안까지 이른다. 이런 유물의 출토 상황은 고조선시대의 일반 무덤에서 농구가 출토되는 것과는 매우 대조것이다. 이상과 같이 그 신분이 비교적 낮은 신분의 귀족도 농업 생산에 종사하지 않았음을 알게 해준다.
생산에 종사하지 않은 지배 귀족은 고조선 전 지역에 걸쳐 거주하고 있었을 것인데 한반도에서도 농구가 출토되지 않은 유적이 많이 발견된다. 이런 농구가 출토되지 않은 유적에서는 모두 청동이나 철로 만든 무기와 마구류와 수레 부품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이런 출토 유물은 이것들이 지배 귀족의 것임을 알게 해준다.
생산을 담당했던 사람들의 유적도 확인되는데 대다수는 농민이었다. 대다수가 농민이었음은 고조선 사람들을 전민 즉 '농사짓는 사람들'이라고 부른 중국 문헌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한서'는 중국의 상, 주 교체기에 기자가 고조선 변경으로 망명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고조선 사람들을 전민이라 부르고 있다. 즉 "은나라의 도가 쇠퇴함에 기자는 조선으로 가서 그 백성을 예의로써 교화하고 농사지으며 누에 치고 길쌈했다. 그 전민은 변두로써 음식을 먹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자는 망명하여 거주했던 지역의 고조선 사람들을 전민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 지역 사람들을 전민이라 부근 것은 그 지역 주민 대다수가 농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은 고고 자료를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고조선시대 유적 가운데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농구가 출토되지 않은 유적도 있지만 여러 유적에서 많은 농구가 출토되었다.
농구들이 출토된 유적은 생산에 참여하지 않은 지배 귀족의 유적과는 달리 직접 생산을 담당한 농민들의 유적인 것이다. 이처럼 유적에는 농구가 출토되거나 그렇지 않은 차이는 고조선에는 생산에 참여하지 않은 신분의 사람과 직접 생산을 담당한 신분의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데 이러한 발굴 자료를 이용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점에 주의해야 한다.
첫째, 지금까지 발굴된 유적 가운데 농구가 출토된 유적과 그렇지 않은 유적의 비율이 고조선시대의 지배 귀족과 생산 담당자의 인구비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지배귀족의 유적은 규모가 크기 때문에 비교적 잘 남아 있어서 쉽게 발견되지만 생산을 담당했던 피지배자의 유적은 규모가 작아 이미 파괴되었거나 흔적이 뚜렷하지 않아 쉽게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발굴된 유적의 비율과 상관없이 고조선의 인구 가운데 생산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지배 귀족보다는 훨씬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둘째, 지배 계층의 무덤에서는 마구나 수레 부품은 많이 출토되지만 농구는 출토되지 않는다고 하여 그들을 기마족이나 그 후예들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고대사회에서 지배 귀족이 말이나 마차를 교통수단으로 이용한 것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그 유물들이 그들이 기마족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농경족이라도 지배 귀족은 농사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유적에서는 농구가 출토되지 않으며 그들의 교통수단이었던 마구나 수레부품이 출토되는 것이다. 예컨대 중국 상나라나 주나라 지배 귀족 무덤에서는 마구나 수레 부품이 많이 출퇴되지만 그들을 기마족으로 보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