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은 고고학적으로는 초기부터 천동기시대였고 사회진화상으로는 국사사회 단계였다. 따라서 청동기문화를 뒷받침하고 국가의 통치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것을 받쳐줄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이 있어야 한다.
고조선은 일찍부터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의 교류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사실은 고조선의 사회와 경제 수준이 결코 낮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을 가능케 한다. 중국의 고대 문헌인 '일주서'에는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직신, 예인, 양이, 양주, 발인, 유인, 청구, 고이, 고죽 등이 성주대회에 참석했던 것을 기록되어 있다. '일주서'는 중국 주나라의 역사서인데 성주대회에 관해 기록되어 있다. 주나라는 도읍인 호경이 너무 서쪽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낙양에 제2의 도읍으로 낙읍을 건설하고 그곳을 성주라고 이름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국내의 제후와 외국의 사신들을 초빙하여 큰 모임을 개최했다. 이것이 성주대회 였다.
따라서 성주대회는 외국에 주나라의 건국을 알리면서 그 위력을 과시하기 위한 성격의 모임이었다. 이 모임에는 당숙, 채숙, 주공 등과 함께 태공 망이 참석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공 망은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칠 때 선봉대장으로 큰 공을 세운 개국공신으로 제나라에 봉해졌던 인물이다. 태공 망이 이 모임에 참석한 것으로 보아 성주대회가 주나라 건국 후 오래지 않은 시기에 개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나라 멸망과 주나라 건국이 서기전 12세기 무렵이므로 성주대회 개최 시기는 서기전 11세기보다 아래로 내려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모임에 고조선의 거수국 가운데 숙신, 예인, 양이, 양주, 발인, 유인, 청구, 고구려, 고죽 등만이 사신을 파견한 것은 이들이 지금의 요서 지역에 위치하여 중국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고조선의 거수국들이 사신을 파견했다는 것은 당시 고조선이 이미 중국 지역과 상당히 깊은 교류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이런 점으로 보아 고조선의 사회 수준이나 경제 수준은 결코 낮지 않았을 것이다.
고조선과 중국 사이에는 큰 전쟁도 있었다. 그러한 큰 전쟁은 경제적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사실도 고조선의 경제수준이 상당히 높았을 것임을 알게 해준다. '위략'에는 중국의 전국시대 연나라가 장수 진개를 파견하여 고조선을 침략하고 그 서부 2천리를 빼앗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라 종래에 일부 학자들은 이 전쟁으로 고조선의 영토가 크게 줄어들었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위략'에는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한 후 조고선과 연나라의 국경은 만번한 지역이 되었다고 적혀 있다. 만번한이 '한서'에 기록된 요동군의 문현과 번한현 지역을 합하여 부른 명칭이라는 데에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만과 문은 중국 동남부 지역의 오음으로는 동일하게 발음되므로 고대에는 이 두 문자의 음이 동일했을 것이기 때문에 만이 문으로도 기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개 침략 후 고조선과 연나라 국경은 서한의 요동군에 속해 있던 문현과 번한현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종래에 일부 학자들은 서한의 요동군 위치가 지금의 요동과 동일했을 것으로 믿어왔다. 명칭이 동일하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서한의 요동군은 지금의 난하 하류 유역에 있었다. 따라서 진개 침략 후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은 난하 유역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은 진개가 침략하기 전에도 난하 유역이었다. 다시 말하면 진개 침략 후에도 고조선과 연나라 국경은 크게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연나라 쪽으로 국경이 이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만번한, 즉 문현과 번한현은 서한의 행정구역인 요동군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가능성은 '염철론'의 기록에서 뒷받침된다. '염철론에는 고조선이 연나라의 국경 초소인 요를 넘어 연나라의 동부 지역을 빼앗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기'에 따르면 당시 연나라에는 요동외요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문맥으로보아 그것은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한 후 설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염철론'에 나오는 연나라 국경 초소였던 요는 이 요동의 요를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고조선이 연나라를 쳐들어가 동부 영토를 빼앗은 것은 진개가 고조선을 쳐들어온 후의 일이었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조, 연 전쟁은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함으로써 일어났는데, 갑자기 침략을 받은 고조선은 일시 후퇴를 하여 넓은 땅을 연나라에 빼앗겼으나 오래지 않아 이를 수복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연나라의 동부 영토를 빼앗아 침략에 대한 응징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연나라는 중국에 있던 일곱 나라 가운데 하나로, 춘추시대 이래 계속된 정쟁을 통해 수많은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연나라의 영토를 빼앗고 응징했던 고조선의 국력은 매우 강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강한 국력은 경제적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하다.
중국인들은 고조선 지역을 매우 풍요로운 곳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시경'에는 고조선이 단군이 서주를 방문했을 때 그를 환영했던 내용의 시인 것으로 필자는 고증한 바 있는데, 그 일부를 보면 "즐거운 한후의 땅이여, 냇물과 못물이 넘쳐흐르고 방어와 연어가 큼직 큼직하여 암사슴 수사슴이 모여 우글거리고 곰도 말곰도 있으며 살쾡이도 범도 있다."라고 하여 한후의 땅은 자연이 매우 풍요로운 곳으로 묘사되어 있다. 한후는 단군을 중국식으로 부른 것이다. 이런 넉넉한 자연환경을 기초로 하여 고조선의 경제는 발전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