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과 한의 관계를 구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국의 위치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후한서'와 '삼국지'에 한이 진국과 연관을 가지고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한과 진국은 모두 고조선의 거수국이었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진국에 관한 가장 빠른 시기의 기록은 '사기'에 보인다. 그 기록에 따르면 "위만의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 때에 이르러서는 천자에게 입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번 옆의 진국이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위만조선과 진국 및 서한의 간계를 말해주고 있다. 위 '사기'의 인용문 가운데 진국은 '사기' 정의본이나 송본에는 진국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오늘날 통용되는 판본에는 중국, 즉 '여러 나라'로 디어 있다. 그러므로 현행 판본을 따른다면 위의 '사기' 기록은 진국과는 관계없는 애용인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이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이와 관계된 기록들을 살펴보자. '사기' 기록을 거의 그래도 옮겨 놓은 '한서'에는 "위만의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 때에 이르러서는, 진번, 진국이 천자에게 글을 올리고 알현하려고 하는 것도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사기'에는 진번 옆의 진국이 '한서'에는 진번, 진국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자치통감'에는 동일한 사건에 대해 "위만의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 때에 이르러서는 진국이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기록하여 '사기'나 '한서'와는 달리 진번은 언급하지 않고 진국만 언급했다.
위의 '한서'와 '자치통감' 기록은 서로 표현은 약간 다르지만 위만조선 옆에 진국이 있었고 진국이 서한과 교류하려는 것을 위만조선의 우거왕이 방해했음을 알게 한다. 이렇게 볼 때 중국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사기'의 현행 통용본보다 진국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정의본과 송본이 옳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설령 현행 '사기' 통용본의 중국이라는 기록을 따른다 해도 '한서'와 '자치통감' 기록에서 진국이 확인되었으므로 위만조선 옆의 여러 나라 가운데 진국이 존재했음은 분명하다.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 '사기'의 진번 옆 진국, '한서'의 진번, 진국, '자치통감'의 진국이라는 표현의 차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 기록들이 말하는 시기는 위만이 준으로부터 정권을 빼앗고 서한의 외신이 되어 그 영토를 확장한 훨씬 후로 위만의 손자 우거왕 때였다. 당시 상황을 '사기'는 "효해, 고후의 시대를 맞이하여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니 요동태수는 곳 위만을 외신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고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여러 오랑캐의 군장이 들어와 천자를 뵙고자 하면 막지 말도록 하였다. 천자도 이를 보고 받고 허락하였다. 이로써 위만은 군사적, 경제적 기반을 닦고 주변의 소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도 와서 복속하여 영토가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위만은 서한의 외신이 된 후 영토 확장 전쟁을 벌였는데 그때 이미 진번은 임둔과 함께 위만조선에 복속되어 위만조선의 영토를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거왕 때 진번은 당연히 위만조선의 영토였다. 그 진번 옆에 진국이 있었던 것이다. '자치통감'이 진번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굳이 진번에 대해 말하지 않더라도 진국이 위만조선 옆에 있었다는 것이 되어 그 사실을 전하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기' 나 '자치통감'과는 달리 '한서'에는 진번, 진국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것을 진번과 진국으로 해석하여 진국뿐만 아니라 진번이 서한과 교류하고자 하는 것을 위만조선 우거왕이 방해했던 것으로 잘못 인식할 수가 있다. 그러나 '한서'는 전체적인 내용이 '사기 기록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인데 '사기'나 '한서' 내용에 진번은 이미 위만조선의 영토에 편입되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진번이 서한과 교류하고자 하는 것을 우거왕이 방해했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한서'의 진번, 진국이라는 기록은 '사기' 기록을 옮겨 적는 과정이나 그 후 '한서'가 전해지는 과정에서 "진번방진국"이라는 '사기'의 표현 가운데 방 자가 탈락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기', '한서', '자치통감' 기록을 통해 진국은 위만조선 가까이 위치해 잇었고 위만조선은 진국과 서한의 중간에 위치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만조선과 진국의 지리적 상호관계를 분명히 밝혀주는 기록이 '삼국지'의 주석으로 실린 '위략'에 보인다 그 기록을 보면 "일찍이 우거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상 역계경이 우거에게 간하였으나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으로 갔다. 그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곳에 산 사람이 2천여 호나 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위만조선에 조공하는 번국과 왕래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위에 나오는 조선상은 '사기'에도 보이는 위만조선의 관직인데 그 관직에 잇던 역계경이 자신의 간언을 우거왕이 받아들이지 않자 동쪽의 진국으로 망명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진국은 위만조선의 동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