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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국가 구조

by $램프 2024. 1. 3.

 

고조선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을 싣고 있는 한국 문헌인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서 고조선의 국가 구조를 직접 설명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고조선의 국가 구조를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 '제왕운기'에 보인다. '제왕운기'에는 "처음에 어느 누가 나라를 열고 풍운을 인도하였던가. 석제의 손자 그 이름은 단군일세."라고 하고 그 주석에 다음가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단군천왕은 손녀에게 약을 먹도록 하고 사람이 되게 하여 단군신과 결혼시켜 아들을 낳게 하였다. 이름을 단군이라 하였는데 조선 지역에 거주하며 왕이 되었다. 그러므로 신라, 고구려, 남북옥저, 동북옥저, 예와 맥은 모두 단군을 계승한 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라, 고구려, 남북옥저, 동북옥저, 예, 맥 등을 모두 단군이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는 점이다. 이와 연결된 내용이 '제왕운기'에 보인다. 즉 "때에 따라 합하거나 흩어지거나 흥하거나 망하여서 자연에 따라 분계되어 삼한이 이루어졌다. 삼한에는 여러 고을이 있었으니 다정스럽게 호수와 산 사이에 흩어져 있었다. 각자가 국가라 칭하고 서로 침략하였는바 70이 넘는 그 숫자 어찌 다 밝혀지겠는가? 그 가운데 큰 나라가 어느 것인가? 먼저 부여와 비류가 이름 떨치었고 다음은 신라와 고구려이며, 남북옥저, 예, 맥이 따르더라. 이들 나라 여러 임금님들 누구의 후손인가 묻는다면 그들의 혈통 또한 단군으로부터 이어졌다. 그 밖의 작은 나라들은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옛 책을 찾아봐도 알 길이 없고 지금의 고을 이름도 그때와는 다르니 떠도는 이야기를 따져봐도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위치해 있었던 삼한, 부여, 비류, 신라, 고구려, 남옥저, 북옥저, 예, 맥 등 여러나라가 '전조선기' 주석에는 고조선의 통치 지역으로, '한사군급열국기'에는 단군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 '제왕운기'는 고조선이 붕괴된 후 오랜 세월이 지난 고려시대에 저술되었기 때문에 내용을 믿을 수 없다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그렇게 볼 경우, 위의 내용은 역사에서 고조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윤색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제왕운기' 내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경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즉 이 여러 나라들은 원래 고조선에 속해 있었는데 후에 각각 독립했으며, 그 나라의 통치자들은 고조선 단군의 후손들이라는 뜻일 것이다.

 

따라서 '제왕운기' 내용을 분명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고조선의 사회 상황을 전해주는 기본 사료를 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사료로 '시경'에 있다. 그 내용 가운데 일부를 보면, "커다란 저 한의 성은 연나라 군사들이 완성한 것. 선조가 받은 천명을 따라 여러 오랑캐 나라들을 다스리신다. 서주의 왕은 한후에게 추나라와 맥나라까지 내려주었다. 북쪽의 나라들을 모두 맡음으로써 그 지역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라고 했다. 이 시는 서주의 선왕 때 서주 왕실을 방문한 한후를 칭송하여 지은 것으로 당시 서주의 대신이었던 윤길보의 작품이라고 전한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한후와 한의 성에 대해 동한시대의 왕부는 그의 '잠부론'에서 "무릇 환숙의 후손으로는 한씨, 언씨, 영씨, 화여씨, 공족씨, 장씨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한의 후손으로서 희성이었다. 한편 옛날 저수의 선왕 때에 또한 한후가 있었으니 그 나라는 연나라에서 가까웠다. 그러므로 '시경'에서 말하기를 커다란 저 한의 성은 연나라 군사들이 완성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 후 한의 서쪽에서도 성을 한이라고 하였는데 위만에게 공벌 당하여 해중으로 옮겨 가서 살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왕부가 한 말의 뜻은 이러하다. 서주 왕실과 동성인 희성으로서 한나라 제후였던 환숙의 환숙의 후손으로는 한씨, 언씨, 영씨, 화여씨, 공족씨, 장씨 등이 있었으니 이들은 모두 성이 희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한과 다른 또 하나의 한후가 있었으니 그 나라는 연나라에서 가까웠다는 것이다. 환숙이 봉해졌던 앞의 한은 지금의 섬서성에 있었던 서주의 제후국을 말한 것으로 그 군주 또한 한후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경'에서는 지금의 섬서성에 있었던 한후와 서주의 선왕 때 서주 왕실을 방문한 한후를 구별하기 위해 그 나라가 연나라 가까이 있었고, 그 나라에 있는 한의 성은 연나라 군사들이 완성한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한후라고 불린 사람은 누구이며 그 나라는 어디에 있던 어떤 나라였는가? 고대 중국에서는 제후의 호칭으로 그 국명에 제후를 뜻하는 후자를 붙여 사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므로 이 한후도 중국의 제후국인 한나라의 제후를 뜻할 것이라 믿는 학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예가 모든 경우에 반드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여기 나오는 한후는 누구를 말하는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위 '잠부론'인 인용문 가운데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은 연이라는 나라와 위만이라는 인물이다. 연나라는 서주 무왕의 동생 소공 석이 봉해졌던 서주의 제후국으로서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전국시대 말까지 존속했는데, 전국시대에는 중국의 가장 동북방에 위치하여 고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연나라의 위치가 지금의 북경과 천진 지역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그에 관한 기록을 보면 '사기'에 "무릇 연 또한 발해와 갈석 사이에 있는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북쪽으로는 오환, 부여와 이웃하였고 동쪽으로는 예, 맥, 조선, 진번과의 이익을 관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아 연 지역은 발해와 갈석산 지역 사이에 위치하여 고조선의 변경인 예, 맥, 조선, 진번 등의 지역과 이웃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발해와 갈석산의 위치에 대한 주석으로 '사기정의'에 "발해와 갈석은 서북쪽에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