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한국사 학계에서는 창해군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갖지 않은 듯하다. 한국사 사전들에 창해군에 대한 독립 항목이 없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내용이 아주 빈약하다. 창해군에 대한 통념을 알기 위해 먼저 사전류에 나타난 창해군에 대한 설명을 보면
"B.C 128년 무렵 한이 예맥이 투항을 받아들여 그곳에 설치한 군현."
"지금의 강원도 지방에 있던 군명. 한 무제가 원삭 원년에 동예 지방을 정벌하고 그곳에 두었는데 3년 후에 폐지하였음. B.C 128년 한무제가 만주 요동 지방에 있던 예맥의 땅에 설치한 행정구역. 당시 위만조선에 예속적 관계를 가지고 있던 예군 남려가 조선왕 우서와의 관계를 끊고 그가 지배했던 28만의 인구와 함께 한나라에 내속을 청하자 한의 무제는 이곳에 창해군을 설치하였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창해군이 서한 무제 때 설치되었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나 창해군이 위치에 대해서는 강원도 지방과 만주 요동 지방으로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으며, 그 설치 과정에 대해서도 예맥족이 투항해 오므로 서한이 그들을 받아들여 설치했다는 견해와 서한이 동예를 정벌하고 설치했다는 견해로 나뉘어 있다. 이러한 견해들은 그동안의 창해군에 대한 연구 결과가 압축되어 나타난 것이다.
"일찍이 이익은 창해군의 위치에 대해 "장량이 진 시황제를 저격할 때 동쪽으로 와서 창해군을 만나보았는데 해설자의 말에 창해는 곧 예맥이다. 했으니 지금의 강릉에 해당된다. 그러나 한 무제 때 예군 남려가 요동에 예속되어 그 땅으로 창해군을 삼았는데 응당 작은 고을 하나로 군을 삼지는 않았을 것인즉 그 땅이 반드시 남쪽으로 멀리 미쳤을 것이다."라고 하여 진제국 말기에 진 시황제를 저격할 역사를 구하기 위해 장량이 만났던 창해군이 살았던 지역과 서한 무제가 예군 남려 등의 거주지에 설치했던 창해군의 위치를 동일한 곳이었을 것으로 보고 그곳을 지금의 강릉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안정복도 창해군의 위치에 대해 이익과 같이 강릉을 중심을 한 강원도 지역으로 보면서도 "고구려 태조왕이 동옥저를 취하였는 바 그 땅이 동쪽으로는 창해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동옥저의 땅은 지금의 함경남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옛날 예의 땅은 어디까지이고 한 무제가 설치한 창해군이 통솔한 땅 또한 어디까지였을까?"라고 하여 창해군이 강원도 일대는 물론이고 함경남도를 포괄한 지역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안정복이 함경남도 지역을 창해군에 포함시킨 것은 위의 인용문 내용에서 확인되었듯이 고구려 태조가 동옥저를 차지하여 그 영토가 창해에 이르렀다는 '삼국사기' 기록의 창해라는 표현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창해라는 말은 특정한 지역 명칭 외에도 '넓고 큰 바다' 또는 '동해'라는 일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 기록을 태조가 동옥저를 차지하여 그 영토가 넓고 큰 바다인 동해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창해라는 표현에 근거하여 함경도 지역을 창해군에 포함시키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게 된다.
유득공은 창해군을 지금의 춘천 지역으로 보았는데, 조선시대 학자들인 이익과 안정복, 유득공 등이 창해군의 위치를 강원도 지역으로 추정한 것은 창해군 설치의 원인이 되었던 예군 남려의 세력인 예족의 거주지가 '후한서'과 '삼국지'에 함경남도 남부와 강원도 지역으로 기록된 것에 근거한 것이다.
'후한서'와 '삼국지' 기록은 중국의 동한과 삼국시대의 상황을 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서기 23년부터 265년까지의 상황인 것이다. 이 시기에 예족의 일부가 함경남도 남부와 강원도 지역에 거주했던 것이다. 함경남도 남부와 강원도 지역에 거주했던 이 예족의 나라를 한국사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동예라고 부른다.
그런데 동한 이전 시대에 관한 문헌에서는 예족의 거주지가 함경남도 남부나 강원도 지역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다음에 밝혀지겠지만, 동한시대 이전에는 예족이 지금의 요서 지역에 거주했었다. 그런데 동한시대에 이르면 예족의 일부가 함경남도 남부와 강원도 지역으로 이주해 있었다. 그러므로 예족의 거주지를 함경남도 남부와 강원도 지역만으로 국한시켜 창해군의 위치를 추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더욱이 예군 남려의 창해군은 동한시대보다 앞선 서한 무제 때 설치되었다. 그런데도 그보다 후대인 동한시대의 예족 거주지를 창해군으로 추정한 연구 방법은 잘못되었다. 이러한 잘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익과 안정복, 유득공 등의 창해군 위치에 대한 견해는 후대 학자들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다.
한편 일본의 시라코리 구라키치는 창해군의 위치를 지금의 압록강 상류 유역 및 동가강의 정 유역을 포함한 지역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시라토리는 그동안 역사학자들이 예맥족이 거주지였던 강원도를 창해군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보아왔지만 창해군은 서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기 전에 설치되었으므로 위만조선의 동부 영토인 강원도에 서한이 창해군을 설치한다는 것은 실제로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중국 문헌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예맥족은 강원도 지역에만 거주한 것이 아니라 부여, 고구려 등 다른 지역에도 거주한 것으로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