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만조선과 한사군의 위치를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한사군의 상호 관계를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서로 계승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오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들은 동일한 지역에 위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기자라는 인물부터 고찰해 보자.
기자는 중국 상 왕실의 후예로서 기라는 제후국에 봉해졌던 자라는 작위를 가진 제후였다. 상나라의 갑골문에서는 기자가 기후라는 칭호로 나타난다. 상나라에는 제후의 작위로서 후, 백, 자, 부 등이 있었는데 후가 대표적인 작위였으므로 기자는 기후라고도 불렸던 것이다. 기자는 고대 중국의 여러 문헌에 보일 뿐만 아니라 당시의 기록인 갑골문에서도 보이므로 실존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기자의 성은 자였고 이름은 서여였다. 고대 중국에서 작위는 사회 신분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장자에게 대대로 세습되었기 때문에 역사상 기자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었다. 이러한 여러 명의 기자 가운데 한국사와 관계를 맺고 있는 기자는 상나라와 주나라 교체기에 살았던 인물로서 주나라 초기에 조선으로 망명했다는 기자 서여인 것이다.
기자는 비간 미자 등과 더불어 상나라 말기에 있었던 세 사람의 어진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상나라 마지막 왕인 제신이 포악한 정치를 하자 비간이 이를 간하다가 죽임을 당했고 미자는 도망갔으며 기자는 거짓으로 미친 척하다가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주 무왕이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서주를 건국한 후 그의 동생 소공 석을 시켜 기자를 감옥에서 풀어주었다. 그러나 기자는 그의 조국이 망하고 주 무왕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나게 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조선으로 망명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연에 대해 상서대전에는 다믕과 같이 적혀 있다.
무왕이 은나라를 이기고 공자 녹부로 하여금 왕실을 계승하게 하고 기자가 갇혀 있는 것을 풀어주었다. 기자는 주나라에 의해 석방된 것을 참을 수 없어 조선으로 도망하였다. 주나라의 무왕은 그것을 듣고서 그를 조선에 봉하였다. 기자는 이미 주나라로부터 봉함을 받았으므로 신하의 예가 없을 수 없어서 무왕 13년에 내조하였는데 무왕은 그가 내조한 기회를 이용하여 홍붐에 대해서 물었다.
고 했다. 위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기자는 서주 무왕의 봉함을 받고 조선으로 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망명했는데, 후에 무왕이 그것을 듣고 그를 봉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봉했다는 뜻은 기자가 서주를 버리고 망명한 행위를 죄로 다루지 않고 조선에 거주하도록 인정해주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위의 인용문에 의하면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한 시기는 서주 초였으므로 서기전 12세기 말 무렵 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고조선 중기에 해당한다.
고려 말과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서주 무왕에 의해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내용을 중국의 천자가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면 그것은 기자가 조선 전체의 통치자가 되었음을 의미할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고조선의 뒤를 이어 기자조선이 있었던 것으로 한국 고대사를 체계화했다. 그러나 그러한 체계에는 큰 오류가 있다. 기자가 고조선 전체의 통치자가 되었으니 그렇지 않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먼저 기자가 망명한 곳이 조선의 어느 지역이었는지를 밝히는 작업이 이루어졌어야 했다. 조선은 고조선의 국명이었으므로 그 변방이나 중앙이 모두 조선으로 불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은 행해진 바가 없다.
기자와 그의 후손들은 고조선 영토의 서부 변경에 위치하여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중국인들에게 조선후라고 불리고 있었다. 다음에 보게 되겠지만 기자와 그의 후손들은 그들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중국의 연나라와는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그러나 토착세력인 고조선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는 기록은 발견할 수 없다. 단지 삼국유사에 기자가 망명 오니 단군은 도읍을 장당경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기자의 40여 세대 후손인 준왕 때에 이르러 위만에게 정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후한서 동이열전 예전에, 무왕은 기자를 조선에 봉했는데 그후 40 여 세대 후손인 조선후 준에 이르러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서한 초에 나라가 크게 어지러우니 연제조의 사람들로서 피난하여 그곳으로 간 사람들이 수만 명이나 되었는데 연 사람 위만은 준을 격파하고 스스로 조선의 왕이 되었다.
고 했고 삼국지 동이전 예전에는, 옛날에 기자가 조선으로 갔었는데 그 후 40여 세대 후손인 조선후준이 외람되이 왕이라 칭하였다. 진승 등이 이러나 천하가 진제국에 반기를 드니 연제조의 백성들로서 조선 땅으로 피난 간 사람이 수만 명이나 되었다. 연 사람 위만은 머리를 틀어올리고 오랑캐 옷을 입고 와서 그들의 왕이 되었다. 고 했다 이러한 기록들은 준왕이 기자의 40여 세대 후손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위만이 준왕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건국했음도 알게 해준다 .
위만이 준왕으로부터 정권을 빼앗는 과정에 대해서는 위략에 비교적 자세히 실려 있다. 즉, 위략에 이르기를 옛날 기자의 후손인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퇴한 것을 보고 연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 하고 동쪽의 땅을 침략하고자 하므로 조선후 또한 스스로 칭하여 왕이라 하고 군사를 일으켜 거꾸로 연나라를 공격함으로써 주 왕실을 받들고자 하였다. 그 후 자손들이 점차 교만하고 포악해지니 연나라는 곧 장수 진개를 파견하여 그 서방을 공격하고 땅 2천여 리를 빼앗아 만번한에 이르러 경계로 삼으니 조선은 마침내 약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