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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도읍지에 관한 사료

by $램프 2023. 12. 31.

 

고대사회에서 도읍은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이점은 고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므로 고조선의 중심지를 확인하는데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할 것은 도읍지가 어디였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고조선의 도읍지에 관해서는 '삼국유사'에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위서'에 이르기를 지나간 2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라는 이가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열고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요와 같은 시대였다."고 하여 '위서를 인용하여 고조선의 첫 도읍은 아사달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아사달에 대해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을 주석하기를 "경에는 무엽산이라 하였고 또한 이르기를 백악이라고도 하는데 백주 땅에 있다. 또는 개성 동쪽에 있다고도 하는데 지금의 백악궁이 그것이다."라고 했다. 즉 아사달에 대해 '산해경'에는 무엽산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사람에 따라서는 백주에 있는 백악이 그곳이라고도 말하며 개성 동쪽에 있는 백악궁이라고도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연의 주석으로 보아 고조선의 아사달 위치를 고려시대에도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당시의 학자들의 아사달의 위치를 한반도 내에서 찾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백악을 황해도 구월산으로 보기도 하지만 백악은 한국 여러 곳에 있는 산의 이름이며 백주는 황해도 배천의 옛 이름이고 백악궁은 경기도 장단 지방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궁전이다.

 

'삼국유사'는 고조선의 도읍이 아사달 한 곳만이 아니었음을 전하고 있다. "'고기'에 이르기를 환웅은 잠시 사람으로 변화하여 그녀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그는 당고가 즉위한 50년 경인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또 도읍을 백악산아사달로 옮겼는데 그곳을 또 궁홀산이라고도 하고 금미달이라고도 한다. 나라를 다스린 지 1,500년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위에 아사달로 돌아와 은거하여 산신이 되었다."고 했다. 이 내용에 의하면 고조선의 도읍은 평양성, 백악산 아사달, 장당경, 아사달 들이었다.

 

그런데 위에 인용된 '삼국유사'에는 고조선의 첫 도읍지에 대해 '위서'에서는 아사달이라 했고 '고기'에서는 평양성이라 했다고 인용되어 있다. 여기서 '위서'가 말한 아사달과 '고기'가 말한 평양성은 동일한 곳에 대한 다른 명칭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곳을 말하는가 하는 점이 문제로 등장한다. 원래 아사달은 아침 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고 평양은 펴라로서 넓은 벌을 의미 하지만 모두 왕읍 또는 대읍, 장성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으므로 아사달과 평양은 다른 곳을 말할 수도 있고 동일한 곳에 대한 다른 명칭일 수도 있다. 

 

그런데 위의 '삼국유사'에 인용된 '고기'는 고조선의 마지막 도읍지인 아사달에 대해 설명하면서 "단군은 뒤에 아사달로 돌아와 은거하여 산신이 되었다."고 했다. 단군이 아사달로 돌아왔다는 표현으로 보아 마지막 도읍지였던 아사달은 이전에도 단군이 거주한 적이 있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마지막 도읍지 아사달은 이전에도 도읍을 했던 곳인 것이다.

 

그런데 '고기'가 말한 고조선의 도읍지 가운데 아사달이라는 명칭은 마지막 도읍지 이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위서'는 고조선의 첫 도읍이 아사달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위서'의 기록을 인정한다면 '고기'가 말한 고조선의 마지막 도읍인 아사달은 바로 '위서'가 말한 고조선의 첫 도읍지인 아사달과 동일한 곳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보면 고조선의 첫 도읍을 '위서'에서는 아사달이라  하고 '고기'에서는 평양성이라 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어떻든 단군이 아사달로 돌아왔다는 표현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마지막 도읍지인 아사달과 그전의 도읍지 한 곳과는 겹치게 된다. 따라서 '위서'가 말한 아사달과 '고기'가 말한 고조선의 첫 번째 도읍인 아사달과 평양성을 다른 곳으로 본다면 네 곳이 된다.

 

그런데 일연은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평양성에 대해 주석하기를 "지금의 서경이다."라고 했다. 일연이 살았던 고려시대의 서경은 지금의 평양이었다. 앞에서 일연은 아사달에 대해서는 황해도나 경기도 지역으로 주석을 했는데 평양성에 대해서는 지금의 평양으로 주석을 한 것이다. 일연의 주석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지금으로서는 말하기 어렵지만 이로 보아 그는 아사달과 평양성은 서로 다른 곳이었을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일연의 견해를 따른다면 고조선의 도읍지는  네 곳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지난날 고조선의 도읍지를 고증하면서 '고기'의 기록에 따라 고조선의 도읍지를 세 곳으로 보았었다. 그 이유는 고대문헌에서 고조선의 도읍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검독이 세 곡밖에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자의 생각은 기본적으로는 변함이 없지만 최근 증가된 고조선의 관한 자료는 고조선이 조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전의 정치 중심지 한곳을 더 추정해 볼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따라서 조선이라는 국명을 사용하기 전의 도읍까지 합하면 고조선의 도읍지는 모두 네 곳이 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하기 논의 될 것이다.